day-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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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프로그래밍에 대한 에세이를 써보면 어떨까 싶다. 나는 삼 년째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있다. 시작은 폰에서 혼자 쓰는 앱이나 만들어볼까, 이런 거였는데 꾸준히 하다 보니 지금은 웹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사내용 서비스인데 실패할지도 몰라서 업무 외 시간을 주로 써서 만들고 있다. 본업은 개발자가 아니라 인사 담당자다. 중간에 개발자로 전직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으나 하룻강아지라 범 무서운 줄 몰랐었던 게지. 지금은 일하는데 배운 걸 어떻게 잘 써먹으면서 해볼까, 하는 정도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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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취미도 개발, 업무도 개발인 프로그래머다. 기술 자체에 대한 흥미가 있고 문제를 발견하면 근본을 탐구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내가 코딩하고 있는데 옆에서 리팩토링을 부추기는 사람... 남편을 보면 나는 태생적으로 엔지니어가 될 소양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일단 돌아가기만 하면 되지, 하는 류랄까. 남편과는 평소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둘 다 IT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일에 대한 이야기가 곧 이 바닥 늬우스이자 프로그래밍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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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서비스 로그인 화면에는 귀여운 라이언이 나온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칸 위에 라이언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는데 눈동자가 움직인다. 아이디를 쓸 때는 쓰는 걸 훔쳐보다가 패스워드를 적을 때는 다른 곳을 본다. 이 너무너무 귀여운 화면은 어떤 대학생이 만들었다. 어떻게 구현했는지를 블로그에 올려두고 무료로 소스를 공개해 두어서 고맙게도 나는 그냥 가져다가 썼다. 그런데 그 라이언의 눈동자 움직임을 구현할 때 삼각함수가 쓰인다. 싸인, 코싸인, 탄젠트! 그렇게 열심히 배웠는데도 이름만 간신히 기억나는 그것! 수학이 이렇게 귀여운 걸 만드는 데 쓰이는 줄 알았더라면, 학교 다닐 때 좀 더 열심히 배웠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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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라이언 에피소드처럼, 프로그래밍을 배우면서 알게 된 문과생의 소회 같은 것을 적은 에세이를 써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한 꼭지 쓴다면 남편은 분명 프로 개발자 관점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엄청 많을 것이다. 그게 취미도 일도 개발인 사람의 텐션인 것 같다. 그렇게 한 꼭지씩 이어 붙여나가면 읽을 만한 이야기 하나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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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초등학생도 배운다는 코딩을 나는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십 년 어린 후배들은 나에게 파이썬을 배우면 일할 때 도움이 되는지를 묻는다.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하자 이런 질문이 날아왔다. 졸업하는 대학생이 전부 파이썬을 배우는데, 아무나 다 할 줄 아는 건데 그걸 배워서 도움이 돼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프로그래밍을 모르는 세대는 십 년만 지나면 어떤 단절선 상에 놓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조금만 이해도를 가져갈 수 있어도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IT회사를 다니지 않는 내 친구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코딩 에세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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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회사에서 만나 결혼한 부부가 쓰는 코딩 에세이. 누가 이런 걸 사보겠나 싶긴 하다. 본격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에세이를 사려는 사람이 '코딩'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머리가 아프지 않을까. 혹 이 글을 보는 미래의 독자가 있다면 어떤 책이면 좋을지 의견을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