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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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유전자였다. 그 실체를 본 적 없는 것은 내 몸속에 있어서 나의 형태와 성질을 결정했다. 나는 면밀한 계획을 세우는 대신 뭐든 부딪혀 보는 편인데, 그런 성격도 유전자가 상당 부분 결정했을 것이다. <바른 마음>이라는 책에는 사람의 정치적 성향도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렇듯 나라는 유기체는 사실 큰 틀에서 이미 정해진 미래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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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내 순간의 선택으로 뭔가가 바뀐 것들이 있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있다. 첫 회사 선택이 그랬다. 나는 왜인지 주류가 되고 싶었다. 대학 시절 내내 인싸가 되기를 원했었고, 인싸로 지내서 만족스러웠으며 이제 사회생활에서도 어떻게 인싸가 되어볼 것인가, 그런 것이 나의 관심사였던 것 같다. 그런 욕구는 우연히 국가 기간산업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졸업 후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들은 제철, 제분, 재보험사 같은 곳들이었다. 그런 곳에서 일하면 국가 산업에 기여한다는 느낌이 나서 자랑스러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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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이력서의 특징적인 점은 토론대회 수상경력이었다. 그거빼곤 별 볼 일 없는 영어 점수와 평범한 학벌로 서류 경쟁을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운 좋게 면접을 본 곳에서도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친구가 내게 너는 고분고분해 보이지 않는 데다, 토론대회 수상경력까지 있어서 보수적인 회사에서는 꺼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나와 잘 안 맞는 회사에 들어가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실제로 별로 고분고분하지 않다. 본능에 이끌리는 데로 들어가려고 했던 회사 대신, 잘 맞는 곳이 나를 뽑아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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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처음 발을 들인 곳이 IT회사였다. 그룹 연수를 받았던 2주를 제외하고는 출근할 때 정장을 입어본 일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십 년간 대학생 때와 비슷한 캐주얼 차림으로 출근을 한다. 첫 직장에서 대리를 다는 시점에 직급이 없어지는 바람에 지금까지 한 번도 사원 외의 직급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일하는 환경에는 늘 남성과 여성이 반반쯤 있고, 대체로 합리적인 주장은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지내왔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다행인 일어었는지 지금에 이르니 더욱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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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토론에 재미를 느꼈던 시점이 나를 IT회사로 데려다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생에 영향을 준 사건은 IT회사 입사가 아니라 토론동아리 가입일 지도 모르겠다. 거기서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대회 상금을 모아서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그 친구들과 함께 책도 한 권 냈다.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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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의 점들을 찍고 있을 그 시점에는 그 점들이 앞으로 어떻게 연결될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결국 그 점들은 연결된다고. 그 말이 요즘에도 가끔씩 생각이 난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면서 어떤 점을 찍고 있는 걸까. 과거에 내가 찍은 점들이 괜찮은 오늘로 연결돼 있는 것처럼, 당장 무엇을 해나가면 또 재밌는 연결점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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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스타트업 CEO가 된 친구가 우리 부부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기로 했다. 친구가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것도 재밌는 일인데, 남편에게 자문을 구하고 자문료로 저녁을 사겠다고 해서 그게 더 재밌는 것 같다. 친구는 늘 회사가 커지면 나를 영입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요즘에는 그 이야기를 내 남편에게도 한다. 이것은 또 어떤 연결점을 찍어나가는 일이 될 것인가.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점점 재밌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