찡얼찡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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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우울할 때면 나는 우주적 마인드를 가졌다. 이걸 처음 생각한 건 고3 때였다. TV에서 틀어주던 맨인블랙 시리즈에서 사람들 머리 위부터 카메라가 줌 아웃되서 지구가 나오고, 더 아웃되어서 태양계가 나오고, 그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 전체가 고양이 목에 걸린 방울로 끝나는 장면. 늦은 시간 학교에서 나와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 장면이 생각났다. 저 멀리서 보면 나는 정말 먼지만큼 작은 존재일텐데 먼지만큼도 안되는 게 땅이 꺼져라 걱정해봤자, 그 걱정거리는 먼지보다 더 작은 것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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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니까 문제는 간단해졌다. 내 문제는 늘 먼지만큼도 되지 않았다. 대학을 잘 못가서 인생이 조금 고단해지더라도 그건 먼지의 고단함일 뿐이었다. 우주적 차원에서 나라는 존재의 희노애락은 햇볕이나 나야 잠깐 반짝,하고 보일 먼지가 약간 꼬부라져 있는지, 아니면 끄트머리에 솜털이 뻗쳐있는지, 혹은 아주 미세하게 갈색이라거나 뭐 그런정도의 디테일에 지나지 않았다.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힘듬의 크기를 압축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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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자 나는 또 다른 극복방법을 터득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나는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리다고 힘든 일이 없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견딜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지금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비로소 나는 평범한 상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런 힘든 일이 없다면 그 상태가 되려 더 이상한거지. 이렇게 생각하면 나를 어렵게 하는 상황들도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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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느 채팅창에서 나는 '나는 우주의 먼지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울고 싶기도 하고 실소가 나올 것 같기도 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와있다. 오늘 저녁엔 한 무리의 벙개파가 놀이동산을 가자고 했다. 간만에 연락된 김시인이 강남에 들러 얼굴 보고가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고 떡볶이를 먹은 뒤 집에 와있다. 별로 맵지 않은 떡볶이가 뱃속에서 싸한 느낌을 주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먼지 안에 들어와 흡수되는 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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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끔은 먼지 같은 나라도 있어서. 그런 내가 있기 때문에 우주도 존재하는 거지, 하고 생각한다. 먼지만도 못한 나의 괴로움과 행복도 우주적 차원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도. 오늘은 작은 돌부리에 단단히 걸려 넘어진 느낌이다. 일어나서 다시 잘 걸어야 하는데 자꾸 절게 되는 이 상황은 뭘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니까 안 괜찮고, 밤이 되니까 또 더 안 괜찮다. 엉엉. 오늘은 나의 이 우주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괴로움을 일기로 승화시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