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었거든요. 내가 그 사람이 좋으니까, 그걸로 됐는데. 근데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서, 계속 가까이 있고 싶어요. B는 그렇게 말하고 길게 담배연기를 뱉었다. 흰 아지렁이가 그녀의 끝이 휘어진 머리카락의 연장선이 되어 어깨 언저리를 맴돌았다. B는 늘 저렇게 담배를 피웠다. 길게 연기를 뱉으면 연기들이 잠시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녀 주변을 한두 바퀴 맴돌았다. 엉킨 생각의 모양인 듯 오늘도 우리의 대화는 어지러웠다.
2
나는 사람보는 눈이 없는 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보는 눈 보다는 감이 없는 편에 가깝다. 사람을 보면 괜찮은 것 같다는 감,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는 촉, 그런게 없다. 하도 감이 없어서, 여자들은 원래 촉이 좋다는데 난 여자가 맞나, 싶었던 때도 있었다. 대신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시각이 좋지 않은 사람은 촉각이 발달해 있듯이, 내가 그런 감이 없기 때문에 관찰로 메꾸는 것이다. 이런 나에게 최근 멘붕을 안겨주는 일이 있었다.
3
나에게 평소 힘이 되주는 말을 자주 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오래 알던 지인이 그 친구 때문에 힘들다고 나에게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인 이야기는 그 친구가 사람을 가려서 대하는 것을 달리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도 없고, 또 내가 믿는 진실이 맞다고 믿을 수도 없어졌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서 되려 약간 서먹해졌다.
4
예전에 자기 딸이 입던 옷 너 입으라고 엄청 챙겨주고 했던 아줌마 있잖아, 그 아줌마가 엄마한테 엄청 잘했어. 엄마 집에 없으면 집 앞에 옷 가지 챙겨서 두고 가고. 그런데 그 아줌마가 아줌마들 사이에선 얼마나 괴팍하다고 욕을 많이 먹었는 줄 아니. 그리고 그 착한 다혜네 아줌마랑도 한바탕 싸웠었대. 그 착하고 참을성 많은 다혜네 엄마랑 싸웠다면 말 다 한거지. 근데도 그렇게 엄마한테는 계속 잘 했었다? 원래 그 사람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는거야. 하고 엄마는 말했다.
5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라는 건, 결국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면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도 회사에서는 늘 생글생글하게 문의에 답변해주는 인사팀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엄마한테 쉽게 신경질을 낸다. 사람들은 누구나 여러가지 얼굴을 가진다.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달라지기도 하고, 같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특히 남녀관계에서 좋은 사람은 이런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 여자에게 잘 하려면 밤마다 술먹자는 사내놈들에게는 무정한 친구가 되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6
남녀관계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나에게 사랑에 빠지는 건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라는 사실 확인이 아니라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이다, 라는 믿음에 빠지는 것이다. 심지어 B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늘 그녀의 사랑이 신기했다.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온 영혼을 다해 좋아할 수 있지.
7
동아리 모임에서 이별 이야기를 한 친구가 있었다. 여름방학이 막 끝나 그간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저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거든요. 그래서 뭐든지 그 사람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했어요. 내 기말고사가 금요일에 끝나지만 그 친구의 기말고사가 수요일에 끝나면 저는 수요일 저녁부터 방학한 것처럼 그와 함께 놀았어요. 그런 그가 갑자기 딱히 이유없이 헤어지자고 했어요. 저는 왜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가 하자는 걸 다 해주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요.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요. 저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고 진심으로 사랑했거든요.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가는 그 떨림이 울음보다 더 슬펐다.
8
B는 말을 이었다. 왜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금방 찾아낼 수 있잖아요. 요즘에는 그가 없어서 모든 곳에 있는 사람이 다 그 사람으로 보여요. 근데 그 두 가지가 사실 똑같은 거라는 걸 알았어요.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왼편에 카페 테라스 등이 켜졌다. 언니의 그림자가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9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도시 서울에서. 사람들은 참 많이도 사랑하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맨다. 헤매는 방식도 그 사람 수 만큼이나 가지각색이다. 그게 어떤 사람이었든 찾았다면, 그렇다면 그건 참 어려운 일일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찾은 행복을 응원해 줄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B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고 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나는 별로 상관없이 그녀가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