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정(暴政)과 호랑이

by 윤승희

아침부터 날이 덥다.

남편은 회사로 딸은 학교로 가고, 밀린 일들을 하다보니 어느덧 점심을 훌쩍 넘겨 버렸다.

혼자 먹는 점심은 참 귀찮다.

차려먹기도 그렇고, 굶기도 그래서 간단히 김밥을 사먹기로 한다. 주섬주섬 모자를 쓰고 나선다.

역시 햇볕이 뜨겁다.

길을 건너 좀더 걸어가야 하는 김밥집을 포기하고, 집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삼각 김밥을 산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준다는 삼각 김밥 그리고 저렴한 편의점 아이스 커피를 한잔 들고 집으로 들어 왔다.

고작 집 앞 편의점을 다녀 왔을 뿐인데 지친다.


난 삼각 김밥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 표지에 적혀있는 설명대로 개봉을 하는데도 번번히 내 삼각 깁밥은 밥 따로 김 따로이다. 물론 이번에도 나는 밥 따로 김 따로인 삼각깁밥을 먹고 있다.


문득, 구의역 사고로 숨진 스무살 청년이 떠올랐다.

그 청년의 가방에 항상 점심으로 넣고 다녔다던 삼각 김밥....

그 청년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아들의 가방 안에 삼각 김밥을 보고 .... 삼각 김밥 먹을 시간도 없어 점심을 거른 아들을 기억하며 오열하던 그 어머니...


입이 쓰다.....


편의점 커피는 쓰다.




오늘은 공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하루는 공자가 본인 제자들과 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지나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한 여인이 울고 있는 것이었다. 아주 처량하게...
사정이 궁금한 공자 일행이 그 여자에게 다가가니 그 여자 앞에 처참하게 죽은 사내의 시체가 있었다.
바로 그 여자의 남편이었다.
그 여자의 사정은 이러했다.
남편과 그 여자는 이 숲에서 사는데, 이 숲에는 아주 무서운 호랑이가 살고있고 그 호랑이는 이 숲에 사는 사람들을 잡아 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여인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여인은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그리고 본인도 언제 호랑이한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울고 있었다.



여자의 사정이 딱한 공자의 한 제자가 물었다.
" 그토록 무서운 호랑이가 사는 이 숲에 왜 사십니까? 무서운 호랑이가 있는 이 숲에서 나가 산 아래 마을로 가면 될 것이 아닙니까?"
제자의 질문에 여자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원래 저와 남편은 저 산 아래 마을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을에 아주 포악한 군주가 들어오고 하루도 힘들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와 남편은 이 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산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남편이 이렇게 호랑이한테 변을 당한 것입니다."
여자의 대답을 듣던 공자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 보았느냐? 포악한 정치는 사람을 잡아 먹는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공자 시대의 사람들은 부패하고 포악한 정치를 피해 호랑이가 사는 산으로 도망을 쳤다.
그들은 호랑이가 무섭고 두려웠지만 호랑이와 사는 것을 선택했다.

그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공자가 살던 그 시대나 몇 천년이 지난 지금이나 부패하고 도리어 어긋난 정치는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은 폭정을 피해 호랑이가 있는 산으로 도망을 갔다면,

현재 우리는 또 다른 호랑이가 있는 숲으로 도망을 가고 있다.


또 다른 호랑이가 살고 있는 숲.....



이기심, 분열, 과도한 경쟁, 소외 계층에 대한 차별과 멸시,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조롱과 비아냥, 무시과 냉소, 무관심의 이름의 호랑이가 사는 숲으로 우리는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 혹은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자녀만 둘러싸고 있는 견고하고 높은 담을 쌓아 놓고 거기로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부패하고, 부당하며,도리어 벗어난 포악한 정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다.


송파 세 모녀, 노란 나비가 되어 날아간 우리 아이들,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스무살 청년의 죽음....

우리는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정치의 부조리함,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목소리 높여 비난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변함이 없다.






되풀이 되는 사고와 사건 앞에 우리는 다시 실망을 한다. 그리고 냉소하거나 혹은 다시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이기심과 분열 그리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서운 호랑이가 사는 숲으로 모습을 감춰버린다.


폭정이 미쳐 날뛰는 동네를 벗어나, 호랑이를 피해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고 믿으며 우리는 숲으로 향한다.


하지만 숲으로 간 사람들 역시 호랑이에게 변을 당한다.

호랑이에게 변을 당한 사람은 어디에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다. 그냥 본인의 슬픔과 억울함만 남을 뿐이다. 혹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공자 이야기의 여인처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릴 것이다.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랑이를 만나는 것은 예측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힘을 모았을 것이다. 부패한 관리를 내몰아 내고, 도리에 벗어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모질고 긴 싸움을 시작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힘을 모아 공동체를, 우리의 삶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소리도 높여 보고, 싸움도 해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이것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 어느 시대나 부패와 가혹한 정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호랑이가 살고 있는 숲으로 도망 친다면, 우리의 존재는 지금보다 더 비참했을 것이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도 특별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여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나만 잘 살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숲 속 어디에 숨어있는 식인 호랑이 만큼 위험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 수 있는지, 이제는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내가 없는 우리도 없지만, 우리가 없는 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당신도 특별하지 않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가 소중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특별하게 스스로 존재 할 수 없으며, 우리는 누구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그리고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존재들이다.


No man is an Island.


누구든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우리 땅은 그만큼 작아지며,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領地)가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손상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조종(弔鐘)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John Donne(1572-1636), 17세기 영국의 목사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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