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문화를 바꾼, 스웨덴 라떼 파파
인천에 사는 형부에게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바로 스웨덴 라떼 파파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었다.
인천 형부는 이제 막 돌을 넘긴 이쁜 딸을 키우고 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고, 엄마 아빠를 보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 환하고 선한 웃음을 보여주는 아이를 키우면서, 어쩌면 형부는 부모휴가(parental leave: 우리나라에서는 육아 휴직이라 불린다)를 사용해도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스웨덴 라테파파의 일상이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인천 형부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스웨덴 라떼파파- 유모차를 옆에 두고 커피를 마시는 아빠들-는 대부분 부모휴가 중인 아버지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육아휴직(아버지의 달)을 사용하는 아버지들이 유모차를 끌고 공원을 산책하고 장을 보는 장면은 이 곳 스웨덴에서는 낯설지 않은 일상적인 광경이다.
우리 동네 공원에 앉아 있으며,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는 아빠들을 자주 보곤한다.
심지어 한 손으로는 두 아이가 탄 유모차를 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금 큰 아이 손을 잡고 강아지까지 데리고 산책을 나온 아빠를 본 적이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아빠는 아주 여유롭게 세 명의 아이와 한 마리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시쳇말로 '대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전체 노동자 중 육아휴직(부모휴가) 사용률은 아직 저조한 단계이고, 더군다나 남성(아버지)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지극히 낮다. 아직 대체인력제도가 확대되지 않은 상황에서 육아휴직을 맘 편히 내기란 쉽지 않다. 특히 남성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남성이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사용하기까지는 제도와 정책의 정비를 넘어 또 다른 차원의 장애물이 남아 있다.
돌봄과 관련되어 제도의 정비 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돌봄을 둘러싼 우리의 문화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돌봄과 관련된 정책은 상당히 문화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은 노인의 돌봄이건 아이의 돌봄이건 돌봄의 몫은 가족의 몫이고 더욱이 엄마(여성)의 몫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돌봄 정책을 공부하면서 나에게 규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정책이 도입이 되었지만 실효성이 낮거나, 정책의 확대가 더딘 경우, 흔히들 이런 말들을 한다.
"이러한 정책은 우리 나라 정서상 혹은 문화상 시기 상조야 혹은 맞지 않아"
특히 돌봄에 대한 남성의 참여를 고취하고자 하는 제도를 도입했지만, 그 효과성이 미비한 경우 더욱 문화적인 성향을 이야기 한다.
부모휴가제도(육아휴직)를 예를 들어 보면, 현재 많은 국가들에서 부모휴가 제도는 도입되고 실행 중인다.
하지만 이것의 실효성과 제도의 확대 정도는 국가마다 상이한 차이점을 보인다. 특히 남성의 돌봄에 대한 참여 정도는 국가마다 상이하다. 왜 이러한 결과가 생기는 것일까? 이러한 결과의 원인으로 비교 정책분석가들은 국가마다 갖고 있는' 돌봄 문화'의 차이를 지적하기도 한다. 가부장제가 강한 국가일 수록 남성의 돌봄 참여가 저조하다는 것이다. 일명, 돌봄에 대한 가족책임주의가 강한 국가들일 수록 부모휴가에서 남성의 참여가 저조하다는 것이다. 유럽으로 치자면, 남부유럽(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루투갈)이 그러하다. 반대로 돌봄에 대한 젠더평등의 문화가 자리잡은 북유럽의 경우 아동 돌봄에 대한 남성(아버지)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높다.
문화와 정서를 반영해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아동 돌봄이 가족의 몫 혹은 여성의 몫으로 규정된 국가에서 남성에게 돌봄 참여를 고취하는 제도보다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해(양육수당) 지원하는 편이 당장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의 만족도와 효과성을 크게 할 수 있다. 실제로 남부유럽에서는 아동 돌봄에 대한 남성의 참여를 독려하는 정책보다 현재 돌봄을 하고 있는 여성 그리고 조부모(주로 할머니)에게 수당을 주는 제도가 더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돌봄을 지원하는 정책과 그 결과에 대한 관계 고리는 단순히 제도의 문제로 한정지어 바라 볼 수 없는 부분이 분명하게 있다. 가족의 몫으로 여겨지고 있는 돌봄의 경우 ,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의 부모와 나의 어린 아이를가족 안에서 돌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당장 정책을 사용하는 시민들의 선호와 욕구에 맞는 정책을 만들고 설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정책은 분명, 그 정책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반영해야 하고 그들이 행복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해당 문화와 정서의 고착화로 인한 문제점이 부각이 될 경우,
우리는 계속 이러한 문화를 지지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할까?
그렇다면, 현재의 문화와 정서에 맞지는 않지만,
고착화된 문화를 바꾸기 위한 정책을 우리는 지지하고 만들어야 하는가?
돌봄의 영역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부각된다.
(아동 혹은 노인)돌봄이 가족의 몫이고, 더욱이 여성의 몫으로 자리 잡고 있는 기존의 정서와 문화는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데, 특히 아이가 영아일 경우 어머니의 역할이 절대적인 시기가 있다는 점을 나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돌봄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증가되고 제도적 지원이 증가된다 해도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은 여전히 중요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나는 가족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의 가치를 부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돌봄이 가족책임이고, 여성의 몫으로 남는 경우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정녕 아버지인 당신들이 일하느라 놓쳐야만 할때,
노동시장에서의 일 할 의무와 권리만 있지,
정작 당신이 일하는 목적이기도 한 당신의 아이와 보낼 수 있는 그 시간에 대한 권리가 아버지들에게 없을 때.
그것의 예가 바로 스웨덴의 라떼파파이다.
스웨덴은 아동의 돌봄에 있어 아버지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이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가장 관대한 국가 중 하나이다. 그리고 아동 돌봄을 위한 부모의 휴가 제도에서 남성(아버지)의 휴가 사용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이다. 더욱이 아버지만 사용할 수 있는 휴가인 일명'아버지의 달'의 사용율은 단연코 높아서, 아버지들 사이에서는 이 휴가를 사용하지 않으면 본인이 손해라는 인식이 높다(실제로, 이 휴가는 아버지만 사용할 수 있으며, 양도 불가하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 아버지가 사용할 있는 3달의 휴가 기간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휴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족의 입장에서 전체 휴가 기간의 손실을 의미한다).
단지, 부모휴가에서 남성의 사용율이 높아서만은 아니다. 스웨덴 사회에 있다보면, 아이를 돌보는 아빠들의 모습을 너무 흔하게 목격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아버지들의 육아 솜씨가 전혀 서투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도 아이를 키우는 모습은 우리네와 비슷하다. 첫 아이 때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지만, 셋째 키울 때는 돌이 지나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였다며, 놀이터에서 만난 세 아이의 아빠는 웃으며 말한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습관이 있는지, 어떤 장난감을 가장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 ....
내가 만난 스웨덴 아빠들은 줄줄 이야기 한다.
다른 유럽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까지 스웨덴 여성은 가족과 사회에서 비참한 존재였다.
전통적으로 스웨덴에서 남성은 그의 아내를 채찍질 할 권리가 있었다. '뭐? 스웨덴에서?' 하며,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1865년에 스웨덴 정부는 남성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아내를 채찍질 할 권리를 폐지한다. 여성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도, 돈을 벌 수 있는 권리도, 정치에 참여할 권리도 없었다. 당시 대학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학생의 입학을 거부 했으며, 노동력이 부족한 시기 여성을 작업 현장에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해 회사를 그만 두겠다는 남성들의 목소리는 거셌다.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결혼 뿐 이었다. 이러한 스웨덴 남성들에게 아이를 돌보는 것은 전혀 그들의 역할도 의무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문화와 정서는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다.
1970년대 이후 스웨덴 사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돌봄에 대한 정부의 역할의 강조와 더불어 아동 돌봄에 대한 아버지의 참여는 지속적이고 대대적인 정책적 지원을 받게 된다. 바로 현재의 스웨덴 라테파파가 등장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처음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74년 부모휴가가 도입되었지만 이 휴가의 사용자는 대부분 여성(어머니)이었다. 성 중립적으로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제도의 도입 당시 자녀를 돌보기 위해 선뜻 휴가를 내는 아버지는 거의 없었다. 1977년 남성의 휴가 사용률은 고작 2%였다. 1986년 아버지의 독립적인 권리로 아버지 휴가의 권리가 주어지고, 소득 대체율 역시 배우자의 소득 기반이 아닌 본인의 소득에 대한 대체율(1989년 휴가급여는 소득대체율 80~90%수준이었다)이었음에도 여전히 남성의 휴가 사용은 저조했다.
일각에서는 부모휴가제도를 이렇게 비판을 했다.
전혀 문화적 상황에 맞지 않는 제도를 만들어 실효성이 없다고.
맞는 말 같았다. 당시 남성의 휴가 사용율은 높은 소득대체율(80~90%)에도 불구하고 높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스웨덴은 포기하지 않았다.
남성을 돌봄의 영역에 참여 시키기 위해, 1994년 아버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양도 불가능한 '아버지의 달'이라는 정책을 만든다. 휴가 기간 중 총 4주를 아버지만 사용하게 만든 이 제도는 현재 총 12주로 확대 되었다. 제도의 확대 뿐 아니라, 아버지의 달이 도입 되기 전후로 정부는 젠더 평등의 가치를 교육 현장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킨다.
또한 1983년에는 아버지 역할에 대한 보고서가 나오는데, 이 보고서를 보면 돌봄의 고착화된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한 스웨덴 정부의 새로운 전략이 눈에 들어온다.
스웨덴 정부는 제도의 보편적인 확대와 더불어 이 제도가 의미하는 새로운 아버지 상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즉,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고 자녀를 돌보는 아버지가 새로운 아버지 상으로 등장한다.
당시 정부의 캠페인을 살펴보면, 아버지들에게 당신의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적 관점이 아닌 당신의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권리를 챙겨야 한다는 인식의 변화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당시 돌봄에 참여하는 아버지의 개인적 성숙과 아버지들의 돌봄 경험에 대한 연구와 기사가 증가하는데, 이러한 학계와 미디어의 역할 역시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그 결과, 정책 도입 초기 고작 2% 내외였던 아버지의 휴가 사용률은 2017년 현재 80%를 상회하고 있다.
아버지의 부모휴가 사용률이 이렇게 높으니, 당연이 라테파파를 흔히 볼 수밖에.
스웨덴은 절대 변화될 거 같지 않았던, 아버지들의 돌봄 참여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기존의 돌봄의 문화를 바꾸었다.
바뀌지 않는 것은 없다.
생각해 보면, 불과 몇년 전 우리에게 주 5일 근무라는 것이 너무 낯설었다.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한다고 했던 당시 일각에서는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주5일 근무는 일상화 되었다. 물론 여전히 주5일 근무를 하지 못하는 작업장들도 많다. 하지만 이제 주5일 근무제를 달성하기 위해 정책과 사회는 나아가고 있지, 주6일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혹은 주5일제가 시행되면, 우리 경제가 망하게 될거 라는 시각과 주장은 없어지고 있다.
정책이 우리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는 말도 맞지만,
문화를 바꾸기 위한 정책 역시 필요하다.
돌봄에 대한 아버지들의 참여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가 육아휴직을 사용 하기에 제도적으로 지지 기반도 약하고, 주변의 인식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낙담하기는 이르다.
생각해 보면, 아동 돌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라는 말이 나오고 이것이 정부의 관심 사안으로 가시화 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부터 였다. 그 이후 부터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돌봄 정책에 대해 부모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상당히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돌봄 정책(보육시설 확대, 양육수당, 보육료 지원, 양육휴가 등)의 도입과 확대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제는 제도의 문제가 아닌, 문화와 가치의 변화가 남았다. 어쩌면, 이제부터 진정한 제도의 확대의 길목에 우리는 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좋은 정책을 만드는 길은 단순히 제도의 유무가 아니라 그 정책이 갖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그 순간일 것이다.
인천 형부가 꿈 꾸는 라테파파는 애석하게도 아직 우리에게 시기 상조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변한다면,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그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세상에서는 유모차를 끌고 여유롭게 라떼를 즐기는 아빠들의 모습이 전혀 새롭지 않고 일상적인 풍경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