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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희 Mar 25. 2019

바람의 기억

바람의 끝은 그리움에 닿는다.

지난밤에 잠을 푹 못 자서 그런지 피곤하다.

모래 바람이 심한 날은 도통 잠을 푹 잘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래가 창문 앞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요즘처럼 모래 바람이 자주 있을 때는 금세 모래가 쌓이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물청소를 시작한다.

사막의 고운 모래는 물로 청소해야 잘 쓸려 내려간다.

대충 창문 앞 베란다만이라도 청소를 한다. 이래야 창문을 열고 지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청소를 하고 있자니 이른 아침인데도 덥다.

사막의 겨울이 끝났다.

더운 바람이 무겁게 공기를 짓누른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게 불던 그 바람은 하루아침에 덥고 무거운 바람으로 바뀌었다. 아침인데도 벌써 숨이 턱 막힌다.


사막의 겨울은 일 년 중 가장 지내기 좋은 계절이다.



이번 겨울에는 부모님이 다녀가셨다.

부모님만 단 둘이 해외에 나오시는 것은 처음이라 걱정이 되었지만, 스웨덴과 달리 한국에서 아부다비로는 직통 비행기가 있어서 부모님은 그렇게 오셨다.


중동이 처음인 엄마와는 달리 아빠에게 이 곳은 감회가 남다른 땅이다.

우리 아버지는 젊은 시절 중동에 파견된 해외 근로자였다.

9년 정도의 세월을 사막에서 보내셨다.


여기에 오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다.

창 밖으로 높고 큰 건물들을 보며, 아빠는 연신 감탄을 하셨다.

우리 집에 와서도 아빠는 베란다에서 들어올 생각을 하시지 않으셨다.

집 앞바다에서 수영하고 배를 타는 사람들 구경을 하셨다.

그저 이렇게 변한 사막이 신기한 듯, 아빠는 집 앞의 바다를 , 그 위를  날고 있는 새들을, 야자 나무를,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렇게 한 없이 보고 계셨다.

무엇을 그렇게 바라 보고 계시는 건지, 같은 중동 땅이라지만 정확히 여기는 아빠가 일한 그곳이 아니다.

아빠가 9년간의 세월을 보낸 곳은 리비아와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이다.

당시 아빠는 사막에  수로를 놓는 엄청난 규모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셨다. 자고 나면 지형이 바뀐다는 사막 한가운데서 그 엄청난 공사 덕분에 사막에 물이 들어왔고, 도시가 세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끝없이 펼 펴져 있는 모래사막만을 바라보면 일을 하던 아빠에게 그러한 공사 덕분에 세워진 이러한 도시는 전혀 상상치 못한 신기한 광경일 것이다.


"엄마, 할아버지가 베란다에서 주무세요!"

베란다에서 놀던 딸아이가 들어와 말한다.


아침을 드시고 내내 베란다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빠는 따뜻한 햇살을 등지고 꾸벅꾸벅 주무시고 계셨다.

들어와서 편히 주무시라고 해야지 하며 나가는 나를 엄마는 불러 세우신다.


'냅둬라, 그냥 저렇게 자는 것이 꿀잠이야. '


아빠는 비행기에 타면서부터 엄마에게  젊은 시절 중동에서 일했던 이야기를 쉴틈 없이 하셨다고 한다.

"아이고, 내가 네 아빠 수다에 정말 잠 한 숨 못 잤다. 그 젊은 시절 가족과 떨어져 여기서 일했던 것이 뭐가 좋았다고 그렇게 떠드는지 정말, 내가 네 아빠 수다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어!'


아빠가 중동 사막으로 돈을 많이 벌어 오겠다며 나가신 후,  그 긴 시절을 엄마는 홀로 어린 자식 셋을 키우셨다. 엄마에게 그 시절은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런 그 시절이 뭐가 좋다고 연신 이야기하시는 아빠가 엄마는 못마땅하신 듯했다.

그 시절 엄마는 아이 셋을 키우며 하루하루 그렇게 아빠를 기다리셨을 것이다.


아빠는 그 시절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올망졸망한 세 아이와 아내를 두고 아빠는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버텨내셨던 것일까?


지금처럼 전화 통화, 영상 통화도 없던 시절, 아빠와 우리 가족의 유일한 연락 수단은 편지였다.


아빠에게 편지가 도착하며, 엄마는 우리 세 형제를 앉혀 놓고 편지를 읽어 주셨다.

아빠는 편지 봉투 안에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따로 우리 것을 따로 항상 쓰시곤 하셨다.

'사랑하는 혹은 믿음직스러운 우리 첫째 딸 승희 보아라'로 시작하는 아빠의 편지는 아빠와 우리의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다.

아빠에게 편지를 받으면 당연히 답장도 해야 했지만, 엄마는 나와 남동생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아빠에게 편지를 쓰도록 시키셨다. 철없던 시절 나와 남동생에게 편지 쓰기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매주 쓰다 보니, 쓰는 내용도 거의 비슷했다. 나는 주로 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했고, 시험을 봤는데 몇 점을 봤는지,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 이야기, 요새 읽는 책 이야기 등을 썼다. 시험을 잘 본 날은 먼 곳에서 일하는 아빠의 수고에 보답을 한 것 같아 우쭐해서 편지를 썼으며, 학교에 운동회나 소풍과 같은 행사가 있으면 쓸 이야깃거리가 많아 좋았다. 엄마가 한국과 세계 위인전집을 사주신 후부터는 위인전을 읽고 나도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쓰기도 했었다. 철은 조금도 없었지만 이상과 포부만큼은 아주 컸던 시절이었다.


하얀 편지지를 나와 동생에게 주시며 엄마는 항상 먼 곳에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아빠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 편지를 써야 한다고 이야기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사랑을 담아 편지를 쓰기란 여간 어럽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사랑을 담을 수 있을지 고민을 하다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항상 편지에 여러 색깔의 하트를 잔뜩 그려 넣는 것이었다. 아무튼 사랑(?)을 듬뿍 담은 내 편지의 첫머리는 항상 '보고 싶은 아빠에게'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첫머리를 쓰고 이번에는 저번에 쓴 내용 말고 뭔가 다르고 재미있게 쓸 것이 없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방바닥에 누워 편지를 쓰는 남동생이 아주 열심히 편지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참  별일이다 싶어 남동생 편지지를 힐끔 훔쳐보니, 본인이 갖고 싶은 장난감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주로 남동생의 편지를 아빠에게 받고 싶은 장난감 그림이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저러다 또 엄마한테 맞을 것이다.  남동생을 둔 누나들은 잘 안다. '매를 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말이다.  아니다 다를까 편지 검사를 나온 엄마에게 남동생은 혼이 나고

다시 편지를 쓴다. 뭘 잘했다고 아주 서럽게 눈물을 훌쩍 거리며 편지를 쓴다. 아빠는 남동생의 눈물 젖은 편지를 받아 보실 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시겠지, 우리 아들이 아빠가 보고 싶어 울었다고.....

철이 없던 시절이라 나와 남동생은 가족을 위해 고생을 하실 아버지에 대한 걱정보다는 등 뒤에서 이쁘게 또박또박 편지를 잘 쓰지는 감시하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아직 글을 몰라 편지를 쓰지 않았던 막내가 가장 부러웠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아빠는 우리의  편지를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내 소중한 자식들이 삐뚤삐뚤 쓴 편지를 받아보며, 얼마나 그 편지를 또 읽고 또 읽으셨을까.

앞으로 장래 희망이 편지 올 때마다 바뀌는 첫 딸의 하트가 그려진 편지와 사고 싶은 장난감이 많은 장난꾸러기 아들의 눈물 젖은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사막에서 그렇게 버텨내셨을까?


한국 전쟁 직후에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시고, 그 험했던 세상을 혼자 살아 내신 우리 아빠,

세 명의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사막에 가서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아빠.


아빠는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텨내셨을까.


아빠는 항상 편지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강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과연 우리 삼 형제가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자라서 제 짝을 만나 각자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자식을 낳아 살다 보니 가끔은 아빠가 느꼈을 그 가장의 묵직함과 고단함을 조금씩 가늠하곤 한다.

'우리 아빠도, 우리 엄마도 이렇게 막막하고 힘들게 우리를 키우셨을 테지' 하고 말이다.


중동의 나라에 와서 나는 아빠 생각을 많이 한다.

물론 아직도 여기는 많은 해외 근로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이제 여기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로 인도나 파키스칸과 혹은 동남아시아 근로자들이 많이 와서 일한다. 한국은 이제 근로자를 파견하는 나라가 아니라 기술력을 하는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두고 온 세 아이를 위해 사막의 모래 바람과 살이 타는 듯한 중동의 더위를 견디며 일했던 젊은 남자는 이제는 칠십 노인이 되었다.




젊은 아빠의 머리 위로 무섭게 내리쬐던 사막의 햇볕은 지금은 따사로운 햇살이 되어 나른하게 잠을 부른다.


어느덧 잠에서 깬 아빠가 도연이를 부른다.

" 도연아,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그러니까 니 엄마가 너보다 더 어렸을 때,  막내 이모가 아장아장 걷던 때,

할아버지가 여기를 나왔는데...."

아빠의 이야기보따리가 또 풀리려나 보다.


어찌, 이야기가 넘쳐 나지 않겠는가? 이 곳은 아빠에게 가족을 위해 젊음을 바친 곳이 아닌가,

젊은 시절 아빠에게 사막은 이겨내고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다면,

칠십이 넘은 아빠에게 이제 사막은 그리운 젊은 시절의 추억이 되었다.


가족을 위해 젊음을 사막에 바쳤던 그 젊은이는 사막의 바람과 같이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그 사막의 바람은 이제는 그리움이 되어 칠십 노인의 흰머리카락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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