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간 하늘이 뚫어진 듯 비가 내리면서 최근 짜증이 날 정도로 심하던 황사현상도
덩달아 말끔해져 드디어 하늘이 본연의 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봄이 되면서 저 멀리로 보이는 산이 황사로 뒤덮여 여간 답답하지 않았는데
비온 뒤 끝이라, 오늘은 잘 닦은 안경을 낀 것 처럼 선명해서 좋았다.
봄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요 며칠 차가운 날씨에
겨울 옷을 다시 꺼내 입었는데, 오늘은 또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엉덩이를 붙이고 집에만 있는 건 자연을 모독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랫만에 편백나무숲으로 차를 돌렸다. 그런데 가다보니 길이 너무 멀었다.
지난번에도 편백숲을 가고 싶어서 나왔다가 길이 멀어 그냥 돌아오다
예정에 없던 밋밋한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돌아온 적이 있는데, 오늘도 결국 가지 못하고
그냥 그 중간쯤에 위치한 작은 바닷가를 가기로 하였다.
편백숲과는 인연이 없나...
작은 바다여서 걸어서 십 분이면 백사장을 다 돌 수 있었다.
드문 드문 사람들도 보이고 나도 휙휙 걸어다니기 시작하였다.
게가 있는 듯 작은 구멍이 가득한 모래사장에 내 이름도 써보고.
생전 하지 않던 사랑해라는 단어도 써보았다.
요즘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 영상을 많이 보는데 대부분의 영상의 주제는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필수이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충만감, 만족감에 절어있는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부러워한다고 해서 뭐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자신안의 가능성을 보지는 않고 시선은 항상 밖에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자신을 사랑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모래사장에 처음으로 사랑해라는 단어를 써보았다. 좋았다. 작은 시작이지 뭐.
혼자서 피식 웃었다. 이제 한 쪽 구석으로 밀어두었던 나를 슬슬 복원시켜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
백사장 쪽에서 나와 바다를 끼고 돌아가는 뚝방길이라고 해야할까, 조금은 한적한
길이 있어 걸어 들어갔다. 돌아돌아 가보니 조용한 시골 횟집이 하나 나왔다. 간판을 보니
장어탕, 아나고회, 아나고구이등이 있었다.
아나고는 내 고향 부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회감이었는데 여기서 보다니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1인을 반겨하지 않는 시골 식당 정서가 퍼뜩 생각이 나서 과연 저 집 주인은
나에게 음식을 팔까 내심 걱정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여주인은 친구들인 것처럼 보이는 분들과 담소를 나누며 앉아 있었고,
내가 들어서자 입에 오물오물 무언가를 씹으며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들어가면서부터 시선이 이미 곱지 않다.
그리고 손님이 들어와도 앉아있던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서
입에 무언가를 연신 밀어넣으며 말을 하였다.
내가 아나고회 포장가능하냐고 물었는데 마지못해 대답하시는 폼이
영 팔기 싫은 눈치다. 가격을 물어보니 혼자서 먹을 만한 양이 아니어서
조금만 파시면 안되냐고 했더니 그럴줄 알았다는 듯, 안된다며 딱 잘라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나가든 들어오든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여주인.
연세가 너무 많으면 좀 이해를 할까 생각했는데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나랑 서너살 위일 외모의 여사장님이었다.
주인아주머니 통밥으로는 나는 이미 돈 안되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물론 1인을 싫어하는 시골 식당 정서를 알아서 기대는 크게 안했지만
사람이 들어와도 본척 만척 일어나지도 않는 주인의 태도를 보면서 불쾌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치 불청객이 온 것처럼.
시골 아늑한 바닷가의 다정한 정서는 무산되고
오랫만에 감상에 젖었던 나의 가슴은 다시 이성적인 현실로 돌아왔다.
명상책에 보면
'도는 겸손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도의 궁극적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할 때 파장이 낮아지고 파장이 낮아져야
식물, 동물, 사람, 세상의 만물과도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장이 떠 있으면 나보다 낮은 파장대역의 존재들과는 전혀 소통할 수가 없고
그쪽 세계를 내가 아무리 들어가고 싶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겸손'이다.
친한 가족이나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말이 안 통해서 싸우고 갈등하지 않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understand'라는 단어가 거의 겸손이랑 맞먹는다.
'stand'라는 것은 서다라는 뜻인데,
'under'라는 단어가 붙어서 밑에 선다. 이런 뜻이다.
overstand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해한다는 것은, 밑에 선다'는 뜻이다.
상대방과 눈높이를 대등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고
밑에 서서 위로 바라 볼 때,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태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영어가 참 생각보다 정확하다.
겸손해야만 진정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니.
아참, 횟집 아주머니 이야기 하다가 understand 까지 이야기가 와버렸다.
여하튼 세상 어떤 분야에서든 피드백과 서로의 교감이 중요하다. 인공지능조차
인간의 감정을 탑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본래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없이는
사랑도 사업도 성공하기는 어렵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생각이 1초만에 세상에 확산되는
디지털세상에서는 더욱이.
대중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해결해주고자 노력하는 리더가
시대를 주도해 나간다.
트렌드를 만드는 것도 그에 기반한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고,
하수는 고수의 마음을 모른다.
그래서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어 있다.
결국 겸손한 자가 세상을 주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