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신성하고 노동자는 실성한다. (직장/일)
스물아홉(女)
사는 게 졸라 힘들다. 공무원 시험 몇 년 쳤는데 계속 떨어졌어. 이 길이 아닌개벼 해서 취직하기로 마음먹었지. 대기업은 족족 떨어지고 2년 만에 힘들게 중견 패션 기업에 입사했어. 그땐 진짜 날아갈 것 같더라. 부모님한테도 면목없고 기 죽어서 맨날 움츠려 지냈었는데 어둠의 시절과 빠이빠이 한다고 생각하니 진짜 기분 좋더라구. 패션 분야 최고의 마케터가 되어 나중에 내 브랜드로 사업하는 꿈을 꾸게 되었지.
근데 회사에서는 나를 인사과로 발령내더라. 난 분명 마케팅에 지원해서 합격했는데 말야. 1년 반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맨날 허접한 일만 하다 보니까 내가 이런 일 하려고 대학을 나와서 돈 써가며 그 시간 동안 공부했나 자괴감이 들더라고. 허구한 날 엑셀, 엑셀, 서류 정리. 정말 지겨워 미치겠어. 나중에 회사 나갔을 때 도움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입사자 관리, 퇴사자 관리, 교육, 행사 지원, 거기에 위에서 주는 잡무들만 하고 있으니 뇌가 신석기 시대로 회귀하는 것 같아.
이대로 계속 시간만 흐르면 커리어가 이쪽으로 굳어질 것 같아서 걱정돼. 다른 데 몰래 지원하고 면접 보기도 했는데 하나도 안 돼.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만두자니 잘못하다간 쭉 백조로 남게 될까 봐 겁나고, 여행 유튜버라도 할까 생각해 봤는데 경쟁자가 너무 많더라고. 내가 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유튜버 했다가 잘 안 돼서 시간만 낭비하면 더 괴로울 것 같고. 이젠 내가 뭘 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어. 그냥 이런 게 인생인 건가 싶기도 하고. 답답해 죽을 것 같다.
그래. 너 잘못하면 왠지 우울증 걸릴 것 같아 보인다 야. 회사 이 존만이들은 왜 너를 마케팅부로 안 보내서 너를 이렇게 괴롭게 하고 지랄인 거야!
일단 너의 지금 고민이 네가 특이해서 너 혼자만 하는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사실 사람들 거의 다 그래. 지금 잘 살고 있는 건 지도 모르겠고, 회사는 나가기 싫고, 로또나 연금복권만 되면 걍 여행이나 다니면서 편하게 살 텐데 왜 그런 행운은 나를 피해가는 건지 짜증나고. 자기의 지금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사실상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나이 들어도 마찬가지야. 하루하루가 재밌어 죽겠거나 무슨 사명감 따위 갖고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문제의 시작은 우리가 학교에서 교육 받을 때 우리가 뭘 좋아하고 뭘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 알 기회를 갖지 못한 거야. 대학 시험 보고 나면 다 뇌에서 휘발되는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외우느라고 시간 낭비한 것 생각하면 정말 열 받지.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대학 가잖아. 요즘은 어떤가 고등학생 딸내미 적성검사표 봤더니 관련 직업 한 서른 개 넘게 써놨더라. 관련학과는 그것보다 더 많아요. 미친. 그러고 들어가서는 취업 준비 시작하잖아. 내가 평생 일하면서도 즐거울 분야를 찾아서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지.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라고 하니 공시에 매달리는 거고, 돈이 최고라고 하니 어떻게 해서든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기를 쓰지. 이도 저도 아니면 스펙이나 죽어라 쌓으면서 아무데나 취직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싶은 거고. 어차피 취업 못할 거 경험을 쌓기 위해서도 일찍부터 사업 시작하는 애들도 있는 거고. AI 오빠들 출현했으니 어차피 인류 멸망할 거 걍 대충, 대강, 대략 무위의 자세로 살자는 신도가학파도 있는 거고.
둘째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 직장생활을 하며 돈도 많이 벌고 자아실현도 하는 이런 꿈은 버리자는 거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살면서도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 되길 바라는 것도 환상이야. 물론 소수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소수들도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거지. 어떻게든 직장생활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면 지금 회사에서 지금 일에 충실하면서 재미를 붙이는 게 좋다고 봐. 어차피 다른 직장에 가도 비슷해. 구글이니 뭐니 그런 직장인의 천국이라는 곳에 갈 게 아니면 말이야. 그런 곳도 막상 일하면 밖에서 보는 것만큼 천국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생각해 보자. 네가 네 회사의 사장이라면 지금의 너에게 회사의 입장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기꺼이 맡길 수 있을까? 아닐 거야. 능력에는 책임질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되거든. 그렇다고 지금 네가 하는 일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를 그 자리에 두지 않겠지. 회사 입장에서는 네가 마케팅 업무를 하는 것보다 인사 업무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을 거야. 물론 개인이나 조직이나 판단이 다 맞을 수는 없는 거고. 아마도 네가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썼던 내용들, 면접 볼 때 했던 답변들, 신입사원 교육기간 중 평가자들의 의견 등을 모두 감안해서 내린 결정일 거야. 기업들의 HRD 관점에서 그들의 결정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니까. 그들이 얼마나 현명한가는 논외로 하자고.
여하튼 기업의 입장에서도 채용한 직원이 자기 몫을 해주며 오랫동안 근무해 주길 원할 수밖에 없어. 그들 입장에서는 채용과 교육, 사원 시절의 업무까지는 전부 다 투자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거든. 주임이든 대리든 직급을 갖게 된다는 것은 업무 능력도 능력이지만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는 것을 뜻해. 그 전까지는 투자의 속성일 수밖에 없는 거야. 네가 나가면 그 자체로 투자에 실패한 셈이니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고.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채용했을 때의 기회비용까지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거지. 또 다른 사람을 채용해야 하는데 거기엔 또 어떤 시행착오가 발생할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거고.
그러니 일단 직장생활을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제대로 열심히 하는 게 우선이 되어야 해. 재미없는 일, 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지금의 지겨움에서 벗어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할 수 있을까, 일의 효율을 높일 수 있을까, 일이 즐거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일에 조금씩 정을 붙일 수 있을 거야. 정이 붙기 전까지는 일단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도 있는 거고. 지겹다는 생각이 들면 생각만 해도 지겨운 어떤 장면이 자동으로 떠오르게 마인드를 세팅해 봐. 앵커링(anchoring) 기법이지.
예를 들면, 나의 경우는 우리 동네 시장에서 하루 종일 김을 굽는 아주머니에 지겨움이 앵커링 되어 있어. 고기 굽고 밥 볶는 철판 알지? 그 철판에 집게로 나란히 두 장씩 김을 앞뒤로 굽고 정해진 수량이 쌓이면 비닐 포장지에 담아서 쌓아 둔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비닐 째로 접어서 김을 잘라 주지.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본 적이 있었는데 날마다 저 일을 하며 살면 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그 분도 그 일이 미친 듯이 재미있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오랫동안 돈벌이가 되어 준 일이기에 습관적으로 하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천직으로 생각하며 내가 모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겠지. 사실 우리 동네 시장은 굉장히 잘 되는 곳이라 오랫동안 자리잡고 일한 분들 중에는 건물주도 많다고 해. 그게 무엇이든 어쩌면 일이란 오래하는 것에서 자기만의 재미가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가끔 생각하기도 해. 그 일이 고맙게도 충분한 돈을 벌어 주는 일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는 것도 분명 사실일 거야.
정이 붙으면 네 일의 성과를 윗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해봐. 업무를 보고하는 방식이 간결하고 선명할수록 좋지. 구두 보고나 문서 보고나 둘다. 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도 자기들이 했던 일이기 때문에 알아. "아, 이 친구가 일에 열정이 있구나", "노력 많이 했구나", "일 잘하는 구나" 등등 다 생각하고 평가해. 그렇게 인정 받고 신뢰 받는 것을 목표로 하자구. 그럼 일할 맛이 날 거야. 그래서 그때가 되어서도 마케팅 업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든다면 얘기를 하면 돼. 그럼 네 상사도, 마케팅 부서의 사람들도 네 입장을 존중해 주고 환영해 줄 거야. 어쩌면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싶어 하는 너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어.
그런데 죽어도 지금 일 계속하기 싫거나 같은 부서 사람들 꼴 보기도 싫고 잘 어울릴 자신도 없으면 빨리 다른 길 알아봐. 인생 뭐 있냐? 걍 질러. 물론 뒷감당은 네 몫이란 거 잊지 말고. 지금의 선택이 어쩌면 원래의 인생길로 되돌아오는 데까지 10년, 20년의 시간을 우회하게 만들지도 몰라. 그 시행착오와 경험에 네가 충분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 봐. 지금 기준 말고 10년, 20년 후에 말이지.
나는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역동적인 공간이 될 것이라고 봤어. 뉴스에서 우리 대통령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외국 정상들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 줄 아니? 우리 대통령이 우리나라 주도의 남북경제협력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하고자 할 때 그들이 우리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정권 재창출도 무난히 가능하다고 여겼어. 정책의 일관성이 우리나라를 훨씬 더 높은 단계로 올려 놓으리라 예상했단다. 하지만 봐봐. 이 드라마틱한 나라의 현실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설 거야. 나라도 인생도 그런 거야. 넘어져도 일어서는 거지. 아예 넘어서지 않을 방도는 없어. 인생이란 그런 거야. 꽃 길만 걸으라고 하는 말은 악담에 가까워. 그런 길이 없으니 걷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거든. 그냥 한쪽 길 선택하고 뛰어들어. 계속 걸으면서 생각해. 그래도 늦지 않으니까.
여하튼 나도 무조건 네 편!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