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gins

by 오종호

서른 살 내가 직장에서 팀장이었을 때 프로젝트때문에 몇 번 만났던 정신과 의사가 있었다. 그 놈의 특징은 아주 심플했다. 자신이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거기에다 정신과 의사이기에 단 한 번만 만나도 상대에 대해 다 파악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영화 <관상>의 송강호가 울고 갈 정도의 초월적 존재로 자신을 신격화한 놀라운 놈이었다. 굳이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 지 알겠다면서 그 놈, 아니 그 새끼는 매번 자기가 할 말만을 신나게 떠들며 자기의 요구 사항만을 전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역시 갓(God) 급의 인내심으로 그 새끼를 세 번이나 만났지만 결국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아서 프로젝트를 포기하겠다고 회사에 선언했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았던 그 새끼가 뭐하고 사는 지 아주 가끔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곤 했다. 젠장.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그 새끼는 잘 나갔고 죽 잘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골이야.


상담이라는 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솔직히 무척 재미있기는 하다. 다른 생김새만큼 사람들의 고민도 저마다 다르지만 사주 안에 그들이 끙끙 앓고 있는 고민의 이유와 고민에 대한 해결책이 모두 들어 있으니, 사주를 읽고 조언을 건네며 대화하는 시간은 활력과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럴 수밖에. 상대도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해결책을 얻으니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상담할 때마다 나는 그 옛날 그 놈이 선사해 준 가공할 트라우마 덕에 신 노릇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얘기를 경청하고 질문하면서 그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최선의 선택을 제시한다.


고리타분한 철학관 스타일의 답답한 공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싫어서 나는 그냥 전화 상담을 선호한다. 꼭 만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백석역 부근의 내 집필실이자 상담소인 오피스텔로 오라고 한다. 상담했던 고객들의 소개나 유튜브, 브런치, 그리고 책을 통해 나를 알고 연락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본적으로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좋은 분위기 속에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우중충한 것은 질색이다. 얼마 살지도 않는 인생, 골치 아픈 일 투성이인 인생에서 끝도 없이 쏟아지는 문제를 대하는 방식으로는 유쾌함이 최고다. 어떻게든 유쾌하게 살아야 한다. 지천명을 넘어서면서 이것을 나의 인생관으로 확고하게 정했다. 0.2소룡 정도로 몸을 만들어서 그런지 쓸데없이 증진된 활력 탓도 있긴 할 거다.


한 스님이 중생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에게 15일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앞으로 15일 이후의 일에 대해서 말해 보라." 아무도 답이 없자 그가 말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이지!". <<벽암록>>에 나오는 당나라 운문 선사의 화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매일을 좋은 날로 만들어야 할 유일한 책임자다.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더라도, 직장에서 짤릴 것 같은 상황이더라도, 이혼하네 마네 티격티격하고 있는 중이어도, 백수 생활이 천 일을 돌파했어도, 섹스를 못한 지 5년이 넘어가고 있어도, 누군가 나를 오해하여 죽을 것만 같아도, 오늘을 우리가 살기로 작정한 이상 우리는 오늘 하루를 최대한 좋은 날로 만들어야 한다. 밑바닥에 있으면 더 나빠질 것이 없으니 무조건 좋은 날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정상에 있으면 한 발 한 발 내려가는 데서 즐거움을 만끽하면 된다. 어깨를 떨구고 우거지상으로 있어 봐야 나아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혼자 있는 순간이라면 그때가 책을 읽는 중이건 똥을 싸는 중이건 상관없이 무조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자. 장담하건대 호일好日은 好의 모양대로 온다. 음양의 조화처럼 내가 미소 짓고 있어야 좋은 것이 방향을 바꿔 달라붙으러 온다.


상담의 장점은 상담을 할수록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상담 그 자체에서 끊임없이 배우는 거다. 사주를 푸는 게 기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나의 지성과 경험, 태도, 철학이 상담에 녹아 드는 거다. 평소에도 독서와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다. 같은 말을 해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스타일로 해 버리면 그건 꽝이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싸가지 없는 인간도 만나게 되지만 그럴 때는 그냥 수양하는 거다. 좋은 사람만 만나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이다.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는 것이 욕심인 것처럼.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만 일일시호일의 자세를 잊지 않는 한 우리는 좋은 날과 좋은 날의 뒤에서 인생 최고의 날들도 만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서른 살들의 사연을 들으며 나는 나의 서른과 내 상담의 기억들을 그들의 이야기 속에 투영했다. 지문, 홍채와 같은 생체 정보가 각기 다르듯 모두들 디테일한 자신만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문은 달라도 손가락 모양은 비슷하지 않은가? 홍채는 달라도 눈동자는 유사하다. 한 사람의 문제에는 또래의 보편적 고민이 담겨 있다. 사람은 시대와 환경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영향에서 가능한 한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해서 시대를 넘어선 지혜를 조금씩이라도 날마다 가슴 속에 담아야 한다. 나처럼 하자 많은 인간이 누구에게나 도움될 수 있는 무슨 대단한 얘기들을 풀어놓겠다는 허황된 욕심 따위는 없다. 그냥 함께 웃고 넘기며 살짝이라도 좋은 날을 만드는데 힌트로 삼을 만한 껀덕지를 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할 일이다.


내 서른 살 친구와 이름 모를 다른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유익한 말을 건넬 수 있기를 바란다. 그간 이리저리 써 보다가 재미가 없어서 싹 다 지워버리고, 그냥 친구지간에 하는 어투로 쓰는 것이 제일 낫겠다 싶었다. 좋은 친구 끼리는 자주 킥킥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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