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의 미래를 생각하며, 주저리주저리
칼 융의 '집단 무의식' 개념을 떠올려 본다면 코로나19 팬데믹은 현 인류가 일종의 보편적인 심리를 집단적으로 공유하도록 어떤 식으로든 강제했을 것이다. 인류의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자리잡게 된 집단 심리는 심리로만 머물지 않고 국가적, 전지구적 차원에서 각 경제 주체의 생활양식에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차후에도 언제든 신규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인해 생존과 생활이 위협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우리의 가슴에 박힌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공통 심리일 것이다. 익명의 다수를 대상으로 한 오프라인 비즈니스는 분야와 규모에 상관없이 수시로 절망적인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관련 비즈니스 종사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많은 개인이 변화할 경제 환경 하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또한 챗GPT가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AI 시대는 그 강박에 불안을 더할 것이 틀림없다.
소비의 붕괴라는 자본주의 체제 최대의 공포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한 경기 침체, 극단적 대결 구도로 치닫고 있는 세계 정세, 그리고 AI 시대의 개막을 잇달아 경험하고 있는 기업들은 경영 방식의 전환, 사업 분야의 재편, 업무 방식의 변경, 인력 구조의 재편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고용 시장의 불안정성은 가속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재택 근무는 많은 기업이 직원들의 실질적인 업무 방식의 하나로 고려하게 될 수밖에 없다. 상시 재택 근무 방식을 적용해도 충분한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는 분야부터 적극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고 순차적으로 현장에 적용하게 될 것이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업무 능력을 증명할 기회조차 없었거나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서른 살에게는 분명 불리한 여건이다.
각 개인의 처지는 시대의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그 누구도 시대를 뛰어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 시대의 서른 살은 과거의 서른 살과는 다르다. 미래는 늘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계이지만, 현재 너머에 있는 미래는 기성 세대의 앞에 있었던 미래와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노동력이 점점 불필요해지는 세상, 생계 수단 자체가 점차 고갈되는 세상, 미증유의 자연 재앙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인간 존재의 최고 가치라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인간주의자(transhumanist)'들이 예측하는 미래는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유기체인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 주류 종으로 올라서는 세상이다. 레이 커즈와일은 2030~2040년 사이에 인간이 생물학적 한계를 상당 부분 초월하여 살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 근거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기술의 속도를 들었다. 소위 '진화 가속도 법칙'에 의해 '정보'의 일종인 인간도 더욱 복합하고 섬세한 정보로 진화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초인간주의자들이 자신만만하게 예측하는 미래의 기술에 대해 일반인인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학습과 적응을 통해 그 기술의 대열에 동참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애플이 아이폰3G를 세상에 던져 놓자 대부분의 인간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는 그로부터 겨우 십여 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기술을 독점한 천재들이 설계하고 있는 미래는 인간에게 첨단기기를 사용하라고 권하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그 첨단 기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득하는 세상이다. 선택이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면 우리는 그 설득이 강요하는 선택을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초인간주의자들은 팬데믹 사태를 목격하며 자연의 역습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인간 생체의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술 연구 페달을 더욱 힘차게 밟으려 할 것이다.
10년, 20년 후의 세상을 그려볼 수 있는가? 유튜브에 올라 있는 미래 예측 영상들을 보고 생각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외면했는가, 아니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사는 대로 살면 그 뿐이라고 생각했는가? 서른, 석가모니와 같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속세를 떠나 고행을 선택하는 것도 한 편의 삶이요, 되는 데까지 열심히 준비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우여곡절 끝에 직장 잡아서 끝까지 버텨 보는 것도, 자기계발서와 인문 교양서들을 읽고 대중 강연들을 들으며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것도 모두 다 또 다른 한 편의 삶이다. 선택한다고 획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초인간주의자들이 겨냥하고 있는 미래가 성큼 다가와 지식이 더 이상 인간을 변별하는 척도가 될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통해 내가 나임을 증명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미래야 말로 과거의 지혜가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는 사유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서 온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우리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바쁘거나 절망에 허덕이느라 한치 앞을 볼 여유를 갖지 못할 때, 나는 서른 살이야말로 과거의 지혜를 마음 깊이 담기 위해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
내가 가끔 비유적으로 묻는 질문이 있다.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미래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쓴 그저 그런 수많은 책을 일년에 몇 백 권 읽었다고 자랑할 것인가, 아니면 당대는 물론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천재 중의 천재, 깨달은 자 중의 깨달은 자로 인정 받는 사람들의 책 몇 권을 깨우치기 위해 시간을 쓸 것인가?”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서른 살 친구와 그의 친구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고민과 욕망,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서른 살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기록해 보려 했다. 지금의 서른 살들이 쉰 살이 되는 20년은 우리나라의 운명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들이 버텨 주고 그들이 성취를 이루는 사회가 되어야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가능성의 언어라고 신영복은 말했다. 가능성을 키워 주지 못하는 사회, 사회에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어야 할 대학에서 이미 부의 불평등이 증폭되는 사회에 희망은 있는가? 코로나19 시국에 선진국으로 도약한 우리나라의 지금 모습은 어떤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시간은 눈깜짝할 시간보다 빠르다.
나는 우리나라가 교육의 평등을 보장하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국민들에게 돈 걱정 없이 공부하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시간적 자유를 제공하는 대신 빚을 안기는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지천명하여 오십에 접어든 내가 대학을 다니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등록금 걱정, 생활비 걱정 없이 그야말로 원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대학을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선물하지 못했다. 코로나 이후 나는 우리 정치가 우리 사회가 이 선물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이 시대는 그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불평등은 이미 자궁에서 시작된다”는 예란 테르보른의 지적만 더욱 피부에 다가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