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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Sep 26. 2023

오종호명리학 '운인사運人事' 재물편 / 들어가는 말

에너지, 그 오묘한 존재


사주 여덟 글자는 한 인간에 대한 광활한 정보의 보고입니다.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운명의 범주, 사회와 가정 환경, 성격과 기질, 심리상태, 적성과 진로, 직업성, 인간관계, 성패의 시점, 부귀의 정도, 건강과 질병 등 사주팔자가 아우르지 않는 인간사는 없지요. 다만 인간이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할 뿐이며, 지식의 정도와 통찰의 깊이에 따라 파악되는 정보의 양과 가치가 달라집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인간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 사실상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관점에 대해 몸서리를 칠 정도의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여전히 많습니다. 이해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몸으로 느껴지지도 않으며 의미도 알지 못하는 무형 에너지의 모음이 한 사람의 출생 시점에 의해 정해진 채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현실의 삶에 개입한다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요? 


예전의 저 역시 정확히 그들과 같은 인식 위에 서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으니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해할 뿐만 아니라 존중합니다. 그들에겐 그들의 몸으로 감각되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명리학의 본질을 깨우치기 이전에 제가 신조로 삼았던 가치관을 대변하는 다음의 영화 대사가 있습니다.  

 

모피어스: Do you believe in fate, NEO? (운명을 믿나, 네오?)

네오: No. (아니요.)

모피어스: Why not? (왜 믿지 않지?)

네오: Because I don't like the idea that I'm not in control of my life.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있다는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이 대목에서 네오가 한 답변은 당시 저의 가치관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철저히 제 인생의 유일무이한 주인으로 여겼고, 제가 마음먹고 노력하는 한 그 어떤 것도 제 자유의지의 자발적 실천을 가로막지 못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저는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저의 이른 성공에 대해 단 한시도 의구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남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남보다 부족한 시간을 악착같이 쪼개 실력을 키우고 잠재력을 끌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저의 20대에 바치는 절대적인 응원이자 저의 좌절과 방황, 영혼의 고통에 대한 담담한 위로이기도 했지요. 제 삶의 편린을 슬쩍 엿본 사람들이 감히 평가할 수 없는, 매 순간을 오롯이 감당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저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기도 했습니다. 


눈앞에 다가왔던 성공이 찰나의 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꿈꿨던 특별한 삶이 다시 평범한 현실로 회귀했을 때, 떠나간 신기루를 낚아채고자 직장을 박차고 나와 무리하게 사업을 감행했던 이후의 부침 있는 삶 속에서 저는 인생을 달라지게 하는 한 끗 차이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을 막연히 감지했습니다. 제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네오의 신념 체계에 균열이 생긴 시기였지요. 돌아보면, 제가 타고난 에너지들과 운에서 들어온 에너지들의 조합이 제 안의 욕망을 들끓게 하고 저의 심신이 그 폭발적인 에너지들의 힘에 의해 철저히 종속되었던 시절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에너지의 노예


여러분이 믿든 믿지 않든 인간은 에너지들이 빚은 덩어리입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은 육체라는 가시적인 물질 안에 담기는 비가시적 물질입니다. 정신과 육체를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무형과 유형의 차이만 있습니다. 그 역시 인간의 기준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형과 유형의 에너지들이 서로 소통하며 상호작용한다는 것이지요.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고, 정신이 죽으면 육체도 죽습니다. 이 에너지들의 상호작용이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한 심리 상태에 빠져들게 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무리한 선택을 하게도 만듭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에너지의 노예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천성, 천부적 재능과 같은 표현이 존재하는 이유 역시 에너지가 부린 마법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들을 옛 사람들이 목격한다면 마법이나 기적과 같은 단어를 먼저 부르짖었겠지요. 상상도 시대적 인식이라는 바탕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이 과학과 기술의 산물로 수용되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과학과 기술에 대한 그들의 상상력 한계 너머에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광대한 우주공간을 뚫고 어느 날 지구의 하늘에 UFO들이 떠 있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면 우리의 입에서는 과학이나 기술이라는 단어 대신에 "믿을 수 없어", "믿기지 않아", "오 마이 갓" 등의 감정적 표현들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입니다. 


에너지의 노예라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공평하지만 노예의 등급에도 차별성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우선 노예라는 단어에 너무 민감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은하계의 이 태양계에 편입된 이래 공전과 자전 운동을 멈추지 않은 지구를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지구는 철저히 종속된 인자라는 점에서 우주의 노예입니다. 하물며 평생 지구라는 틀에 갇힌 채 살아가는 인간이 우주적 질서를 규정하는 에너지의 노예가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에너지는 인간을 노예로 삼았지만 노예근성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의지까지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곧 자유의지의 정도가 에너지로부터의 피지배성을 감소시키고 더 나아가 에너지의 활용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획된 세계, 설계된 인간


그럼에도 우주의 에너지는 인간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됩니다. 시선을 우리 주변으로 한 번만 돌려 봐도 이 차별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무가 뿌리내린 토양이 저마다 다르듯이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가정과 사회의 환경 역시 저마다 다릅니다. 우발적으로 이 세계에 던져진 것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그래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느껴지지요. 


하지만 명리학 공부가 진전될수록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지 않다는 인식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세계가 거대한 초超 양자컴퓨터 속에서 구동되는 여러 겹의 입체적 게임 프로그램과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 역시 게임의 이전 퀘스트(quest)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퀘스트들을 클리어한 내용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된 보상체계에 의거하여 이동을 거듭하며 현재의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지요.     


얼핏 황당하게 보이는 이런 관점은 사실 엄연히 현대 물리학의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닉 보스트롬은 모의실험 가설(Simulation Hypothesis)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체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속 가상세계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나 <13층> 속 세계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상이 상위의 문명에 의해 의도적으로 창조된 비현실일 수 있는 근거로 그가 제시하는 바를 요약하면 AI기술의 발전이 극에 이른 어느 문명이 오락이나 연구 등의 목적으로 수많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실행된 시뮬레이션 안의 개체들은 자신들이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현 지구 최고의 혁신가인 일론 머스크는 우리 세상이 현실일 확률을 수십억 분의 1 정도로 본다면서 닉 보스트롬의 가설을 지지한 바 있지요.


저는 이러한 세계관이 적어도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의 관념보다는 현실적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래도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면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을 호출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플라톤은 '동굴의 우화(Allegory of the Cave)'를 통해 인간이 동굴에서 실체의 그림자를 실체로 믿으며 살고 있는 존재일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실체는 동굴 밖에 이데아라는 이름으로 실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숙명적으로 동굴을 벗어날 수 없었던 플라톤에게 육체의 사멸이 곧 영혼의 종말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영혼의 여정은 영원한 것으로 그에게 육체란 그 여정을 잠시 함께하는 그릇과 같은 것에 불과했지요. 플라톤은 육체를 바꾸며 지상에서 다회성의 삶을 사는 영혼이 '체험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포인트를 쌓느냐에 따라 다음 생의 질이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포인트의 축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원한 진리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가장 고상한 수준에 도달한 소수의 영혼들만이 더 이상의 윤회를 멈추고 완전한 세계 이데아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플라톤의 사유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미친 놈 취급 받는 경우도 없습니다. 플라톤의 가설이 참일 수도 있다는 실마리는 명리학에서 발견됩니다. 삶이 연속된 다회차의 미션과 같은 것이라는 암시가 사주팔자에 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의 삶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어떤 보상도 어떤 단죄도 결코 늦을 수 없는 것이지요.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평가가 뒤따르게 됩니다. "어차피 한 번 뿐인 삶"을 운운하며 소유와 향유의 쾌락에 젖는 대신 우리는 하늘이 기대하는 우리 자신의 완성형을 향해 정성스러운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명리학의 지혜를 전하는 명리학 완성 시리즈 ‘운명과 인생 사이’


저는 저의 기획인 '운명과 인생 사이'를 통해 후회 없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명리학이 우리에게 건네는 소중한 지혜를 재물편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사의 핵심 요소들에 대한 적나라한 실전 사주 해설을 통해 여러분은 명리학 공부의 정도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명리학을 통해 깨우치게 되는 지혜의 실체에 대해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명리학은 과학적 논리와 철학적 사유가 결합된 학문입니다. 용신(억부용신, 조후용신, 병약용신, 통관용신 등)을 찾고, 격국의 성격과 파격을 구분하며, 자연법이나 물상, 오행 만으로 사주를 풀이하거나 형충파해합 등의 조합에 점수를 매기는데 시간을 쓰는 어리석은 공부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운명과 인생 사이 시리즈를 통해 여러분은 명리학이 얼마나 위대한 체계를 가진 학문인지 깨우치게 될 것이며,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참된 명리학 공부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보는 남다른 시선을 획득하여 비범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실전 상담을 통해 정확성이 검증된 논리와 사유의 사주 해석법이 여러분의 명리학 공부에 큰 희열을 선사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https://tumblbug.com/luckhumanwork



https://www.youtube.com/@luckhuman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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