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여 근대철학이 쌓아 올린 도덕과 이성의 탑을 폭파시켜 버렸다. 상징과 은유가 난무하는 그의 아포리즘적 텍스트 안에서 고정불변하는 진리는 죽고, 세계는 역동적으로 생성,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세계 안에서 인간 역시 힘에의 의지를 가진 생명력 넘치는 몸과 욕망의 존재로 각성되었다. '절대정신' 운운했던 헤겔을 역겹게 생각했던 쇼펜하우어는 철학에서 이성을 몰아내고 자신의 '의지'를 되살린 니체에게 세계 너머에서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중세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근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인간'은 죽고 이제 '욕망하는 인간'이 태어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자칫 생각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을 존재하지 않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아무 생각 없는 자를 대통령 자리로 꾸역꾸역 밀어 올린 사람들의 행위에서 나는 '셍각의 존재'를 느끼기 어렵다. 세상은 생각 없는 자들의 거대한 향연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이야말로 생각을 죽이고 그 자리를 욕망으로 채운 현대인들의 철학적 경구로 잘 어울린다.
부처를 만나 리비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여하튼 프로이트는 인간이 욕망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바로 무의식의 발견을 통해서 말이다.
억압된 욕망이 득시글대는 무의식의 세계를 살짝 먼저 감지한 사람은 쇼펜하우어다. 그는 세계의 본질을 '의지'로 파악했다. 그에게 있어 '의지'란 세상 만물에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범우주적 에너지와 같다. 그로 인해 인간은 맹목적 충동, 갈망, 갈구, 본능에 지배 당할 수밖에 없으며 이의 극복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니체의 초인 정도 되어야 '의지'에서 벗어나 한 차원 높은 인식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타고난 에너지에 휘둘리며 운명의 굴레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실상을 잘 설명해 준다. 에너지의 작용력을 이해하고 그것이 일으키는 충동에 좌우되지 않을 정도의 평정심을 기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에너지에 지배된 채 표류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목적을 수립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명리학적으로 그렇다.
프로이트는 정신을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분했다. 이드(id)는 인간으로 하여금 쾌락 원리를 따라 동물적 욕망을 충족시키게 한다. 현대 사회에 '이드적 인간'은 넘친다. 본능에 충실한 이들의 삶은 동물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충족 불가능한 욕망 앞에서 욕망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기능은 자아(ego)가 담당한다. 공교육이 무너진 우리 사회 현실에서 스스로의 학습과 생각 훈련을 통해 자아를 성숙시키려는 개인의 비중은 높기 어렵다. 생각하는 인간으로 남아 있을 때 우리는 본능을 합리적으로 충족하기 위해 선을 지킨다. 자아는 현실 원리를 따른다.
초자아(super ego)는 도덕 원리를 따른다. 양심에 기반하여 도덕, 규범, 윤리, 법 등과 같은 규칙을 준수하려는 이상적인 정신 작용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부와 권력을 독점한 자들이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규칙을 악용하는 사회에서 초자아가 설 자리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프로이트는 이드를 인간 생명력과 창조력의 원천으로 보았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간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자아와 초자아가 균형 있게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이드는 위험하다. 맹수의 지배 본능에 의해 정신이 잠식된 권력자의 생명력이란 전체주의를 향한 질주로 표출될 것이고, 그의 창조력이란 사회 구성원들의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방식으로 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욕망을 나는 본다. 사주를 이해한다는 건, 당신의 상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인간 통찰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명리학적 깨달음을 얻은 이후 나는 부와 명예, 권력, 출세, 이성, 자식, 인간 관계 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안다. 물론 소수의 인간은 그런 세속적 욕망을 벗어 던지고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정신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걷는다. 그 길은 생각의 길이요, 인간을 뛰어넘으려는 도약의 길이다.
명리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명리학 공부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새로이 눈을 뜨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은 실로 크다. 비전공자의 철학 공부란 인문 교양 수준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런 방식의 철학 공부로 과연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반면 제대로 된 명리학 공부의 장점은 실로 크다.
먼저,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게 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무지하다. 명리학은 인간이 욕망 그 자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인간이 저마다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왜 인간은 고독할 수밖에 없는지, 왜 어떤 욕망은 인간을 비범하게 만들고 어떤 욕망은 인간을 망치는지 알게 해준다. 알면, 마침내 욕망을 다룰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 힘을 철학자들이 가졌다면, 그들의 철학이 좀 더 깊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리학을 통해 도드라지는 인간의 생생한 모습을 철학은 읽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유려하지만 인간과 세계의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세계를 이해하게 해준다. 명리학은 단언한다.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고. 이 세계는 기획되어 있다. 기획된 세계 안에서 '운명'이라는 단어는 운명적으로 다가온다. 명리학을 모르더라도 주역을 공부하고 하늘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져 본 사람이라면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명리학은 그런 사유의 토대가 되어 주는 학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명리학이야말로 인문학의 근간이라고. 명리학을 모르면 사유의 수준이 높아지기 어렵다고.
마지막으로 바로 그 사유력 덕분에 인간의 두뇌가 혁명적으로 개발된다. 인간의 운명을 읽는 학문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사실인가? 그 작업을 정확하고 엄밀하게 해내려는 진지한 노력 속에서 당신은 이전과는 다른, 열린 두뇌를 갖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힘은 오직 열린 두뇌에서 길러진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전체로서의 인간보다 언제나 개체로서의 인간이 우선한다. 타인의 식사가 나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잔인한 몸의 원리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욕망을 타인의 그것에 앞세우는데 익숙해진다.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분투는 욕망을 달성하는데 성공한 후에도 지속된다. 그것은 인간 앞에 새로운 욕망이 도래하기 때문이며, 기 달성된 욕망이 타자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꺼리는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욕망 그 자체가 된다. 오직 소수의 인간만이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테제에서 기꺼이 벗어나 존재한다. 인간이 욕망을 추동하는 에너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과학이 아니라 명리학을 통해서 이해된다.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죄는 지나친 욕심보다 무거운 것이 없고, 허물은 이득을 탐하는 것보다 끔찍한 것이 없으며, 재앙은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는 노자의 말(도덕경 46장)을 곱씹어 보아도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의 욕망을 정확히 포착하고 그것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때 마침내 인간의 몸에서 욕망이 벗겨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인생은 갈망이 아니라 만족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갈망은 갈증을, 만족은 행복을 부른다. 행복에 대한 갈망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슬프다.
나는 노자의 철학을 좋아한다. 그의 '무위'에서 만족하는 삶의 정답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길은 명리학에 있다. 억지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우리 각자에겐 저마다의 길이 있다. 그 길을 걷는데 필요한 일들은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밝혀지게 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욕망과 무관하다. 인내의 과정도 충분히 보람차다. 발목과 무릎에 찾아오는 통증이 싫다고 오솔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인간이 몸인 한 우리는 살아가고,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가려져 있는 저마다의 무위의 길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떠나면 그뿐이다. 나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내 방식으로 압축하고 정리하면서 '명리학을 통한 무위의 삶'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사람들은 오늘도 당면한 문제들 안에서 허우적댄다. 철학을 통해 사람들이 문제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문제라는 산 안에 갇힌 채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철학이 제시하는 길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럽다. 복잡한 길을 단순화하여 산에서 내려오는 길을 제시하는데 명리학은 능숙하다. 산을 벗어나 호젓한 자신만의 오솔길로 접어든 사람들을 보는 마음은 흐뭇하다. 나는 그런 흐뭇함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