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그잔에 물을 채워 전기 포트에 붓는다. 빈 머그잔에는 커피 한 봉을 뜯어 쏟는다. 포트의 램프가 빨갛게 켜지면 이제 물이 끓는데 필요한 것은 시간 뿐. 시간은 반드시 물을 끓인다. 시간이 물을 끓이지 않은 경우를 나는 본 적 없다. 물이 데워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면 그것은 필시 나의 손가락이 건망증에 걸렸거나 전기가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렸기 때문일 터.
포트를 들어 머그잔에 조금 붓고 잔의 손잡이를 잡아 살살 돌리며 커피를 녹인다. 뜨거운 물을 만난 커피는 제 몸을 모두 푼다. 나는 남은 물을 마저 붓는다. 나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 나는 커피를 마실 따름이다. 커피와 만난 물은 이름을 잃고 사라졌다. 커피는 물 안으로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물을 장악한다. 하여, 끝내 잔 안의 세계를 자신의 이름으로 채우고야 만다.
매일 아침 내 안에 커피를 부으며 커피로 변신하는 중이다. 머지 않아 나는 커피로의 변신을 끝마치게 되리라. 그 날 아침이 밝으면 나는 이 욕조 같은 세상에 몸을 담그고 누울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듯 세상도 자신의 손목을 흔들어 나를 녹일 테지. 하지만 나는 결코 실종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은 세상의 한 구석. 이름을 망각하고 나로 물든 그곳.
필요한 것은 시간 뿐. 시간은 기억하고 있다. 커피 속에 담겨 있던 웃음을, 슬픔을, 고독을, 사랑을, 말과 글을, 그리고 마침내 평화를. 나는 다만 바랄 뿐이다.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가 커피로 변한 나를 한 잔 마셔 줄 날이 오기를. 그 맛이 좋기를.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