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 시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 마부는 온힘을 실어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둘의 사이에 끼어들어 말의 목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말은 잠시나마 채찍의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났고, 남자의 정신은 그의 육체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평생 괴롭힌 저주 받은 육체의 고통 속에서 니체는 수 천 년간 지속되어 온 기존의 가치를 때려 부수는 사유를 뽑아냈다. 마른 수건에서 물을 쥐어짜듯, 몸이 아파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그는 "남들이 한 권에 쓸 내용을 한 문장에 압축하는" 글쓰기를 해야만 했다. 그의 책들을 열면 상징과 은유의 홍수로 범람한 사유의 강물이 쏟아지는 이유다.
그 날,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은 삶이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 니체의 뇌를 엄습했다. 그를 살아 있게 만들었던 운명에 대한 사랑이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 처한 존재의 실존을 만나면서 그의 육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생은 허무하다. 탄생과 죽음 사이를 선형적으로 살다 가는 인간의 생애는 무상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상상을 가미한들, 그것이 기억을 상실한 채 또 다시 채찍을 견뎌 내야 하는 말의 고통의 반복이라면 당신은 고통으로 가득 찬 당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럴 수 없다. 차라리 이 생이 끝나기 전 마부의 자리에 앉으려 애쓰는 당신의 모습이 그 증거다. 채찍 대신 당근을 내미는 좋은 마부가 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오늘을 위로하는 거짓이다. 마부가 되는데 성공한 미래의 당신에게는 얼마든지 채찍을 들 기회가 남아 있다.
니체에 따르면 마부는 '힘에의 의지'를 실현한 자이다. 말에게는 그것이 있는가? 그것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뒷발을 힘차게 쳐들어 마부의 면상을 걷어찰 행위는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러기에 마부는 너무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은 아닌가? 닿지 않는 허공을 향해 발을 뛰웠다가 더 강도 높은 채찍 세례가 쏟아질 것이란 상상이 말의 고개를 떨구는 것은 아닌가? 당신처럼. 세상 사람들처럼. 도래하지 않은 일은 모두 거짓이다. 달콤하면서도 기괴한 소설 속 이야기처럼.
일어난 일도 모조리 허구다. 그대가 오직 그대의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Y는 학원업으로 부를 일구는데 성공했다. 그녀의 남편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지냈다. 그녀는 무능한 남편 탓에 일과 자녀의 교육에 바쳐야 했던 자신의 인생을 가여워 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그 가여운 인생을 남편의 그것과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녀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남자의 사랑과 평범한 삶이라는 결핍을 보는 그녀의 시선을 나는 다른 곳으로 돌려 주었다. 남편의 눈에 담겼던 시간의 풍경이 그녀의 마음에 담겼다. 그녀는 채찍을 버린 마부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K의 남편은 눈을 뜨지 못했다. 그는 병약했다. 그가 평생 일군 자산은 그의 아내에게 건네졌다. 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녀는 마부가 되었다.
인생은 무상하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멈추고, 남은 자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당신이 아직 당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당신이 되고자 하는 마부의 모습은 어떤가? 로또에 당첨되어 돌아오는 월요일 사표를 던질 수 있는 느닷없는 자유가 혹시 그것은 아닌가?
채찍 아래로 들어가 말의 목을 껴안고 목 놓아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니체의 마음을 나는 사랑한다. 강한 자는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타인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의 시간을 채우고 있는 짙은 그림자를 걷어 내기 위해 자신을 한 줄기 빛으로 쓰는 사람이다. 너의 참혹한 운명조차도 사랑하라고 떠든 헛소리는 그렇게 반성된다.
니체의 강함은 그의 나약함에서 완성되었다. 성찰하는 자는 나약하다. 악할 수 없어서 선하다. 모든 참회는 말과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된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일생일대의 행동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당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