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종신역역이불견기성공 날연피역이부지기소귀 가불애야
-종신토록 몸을 아끼지 않고 일에만 힘쓰면서도 성공을 보지 못하고, 피곤하여 기운 없이 고달프게 일하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 제물론(齊物論)
장자는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사람의 감정에 주목합니다. 잘 때는 정신이 어지럽게 뒤섞여 마음이 편치 않고, 잠에서 깨면 몸이 고생스러우며, 항상 외부세계에 얽매여 온종일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을 일으키는 근원에 대해 사유합니다.
도(道)라는 참된 주재자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현상에만 급급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우매함 때문이라는 것이 장자의 결론입니다. 진실한 말이 화려한 꾸밈에 가려지듯, 현실의 작은 성취에 연연하느라 그 뒤의 참된 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장자에겐 유가와 묵가 간의 논쟁도 그런 예에 불과합니다.
현실적 조건 하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장자는 애잔함을 느낍니다. 시비, 선악, 미추 등의 분별에 사로잡히는 대신 밝은 지혜로 사물과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기를 원합니다. 상대적 관계에 집착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며 영원한 순환적 변화의 이치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문의 자연스러운 여닫힘을 조율하는 것이 경첩입니다. 그것은 문 안팎을 구분하기 위해 있지 않습니다. 문의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두 세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존재하지요. 장자는 '도추(道樞)'라는 용어를 씁니다. '도의 중심축'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을 주재하는 도의 정수, 근원과 같습니다. 저마다 나뉘어 있는 듯 보이는 모든 것이 실상은 이것 하나에 연결된 채 상호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실적 삶에 소용되는 도구적 지식에 함몰되어 있으면 이런 장자의 사유가 낯설게 다가옵니다. 도추를 태극이라고 생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태극은 상대적 있음과 없음을 아우르는 도의 운동성을 상징합니다.
딱히 이유를 모르면서도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움직이다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퇴장 당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장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성패, 빈부, 강약의 상대적 개념에 지배된 채 '소유'라는 절대선을 향해 앞과 위를 향해 질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장자가 묻습니다.
'그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둠속에서 벼랑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잠시 멈추고 해가 뜨기를 기다려 길을 확인해도 늦지 않습니다. 햇빛을 닮은 밝은 지혜를 터득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기술 문명의 극한이 통제 불가능한 산물에 의한 인류의 절멸이라면 인류사 전체가 아주 진한 블랙 코미디 한 편과도 같겠지요. 우리는 압니다. 인류의 뜀박질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임을. 인간은 너무 감정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