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장자는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 나비가 된 장자는 자신이 장주라는 이름의 사내임을 인식하지 못하지요. 잠에서 깬 장자는 생각합니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호접몽 얘기입니다. 이 얘기에 앞서 장자는 그림자와 그림자 경계와의 대화를 통해 물체에 의지하여 따르는 그림자처럼 '나' 역시 무엇인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존재일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장자는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인 도(道)를 감지했지요. 우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우리는 지구라는 터전에서 이 시대의 한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의 무상함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나'를 있게 한 조건에 대한 호기심과 그 조건을 형성하고 작동시키는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탐구는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철학하는 동물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운명이라는 굴레 안에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니체의 개념대로 그 굴레는 영원히 회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명리학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래서 깊은 무력감이 밀려들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새로운 생성의 기운으로 화하지요. 이 세상이 하나의 매트릭스와 같고 이 세상 너머에 노자와 장자가 도라고 불렀던 그것이 엄연히 실존하고 있다면, 그것을 엄밀한 근거를 통해 확인하게 된 사실은 '네오'가 될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니까요. 비범한 인생을 창조할 가능성 말입니다.
장자는 자신과 나비 사이의 구분을 '물화(物化)'라는 단어로 규정합니다. 여러 해석이 존재하지만 맥락상 간단합니다. 인간은 '무아'적 존재입니다.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나비가 되었다가 장주가 되었다가 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모른 체 낮에는 활기찬 직장인의 모습으로 살았다가, 저녁 때는 술집에서 유머를 구사하는 재치꾼의 모습으로도 살았다가, 취한 몸을 끌고 텅빈 공간에 홀로 누웠을 때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으로도 사는 것이지요. 물론 가족이 있어도 매한가지입니다. 본질을 잃고 실존에 주력하는 모든 인간에게 고독은 예외 없이 숙명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