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by 오종호

장자의 아내가 죽어 친구 혜자가 조문을 갔습니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자. 그것이 처상을 당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었던 혜자는 쓴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장자는 태연하게 답합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난들 어찌 슬프지 않았겠나?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애초에 삶이란 존재하지 않았더군. 삶뿐만 아니라 형체도 없었어. 형체뿐만 아니라 기도 없었지. 황홀한 가운데 뒤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제가 나타났으며, 형체가 변하여 삶이 있게 된 것이었어. 지금 또 변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지. 이는 단지 춘하추동 사계절의 흐름과 같네. 이 사람은 이제 천지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큰소리로 곡을 하는 것은 운명의 이치를 모르고 하는 일 같아서 그만두었네."



장자는 역(易)의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불변하는 하늘의 섭리에 따라 변해갈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그 진리를 알게 되면 죽음 앞에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성격의 죽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억울한 사회적 타살 같은 것이지요. 그런 죽음을 제외한다면 삶을 부여 받았듯 죽음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장자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덧없음을 잘 압니다. 그 덧없음 가운데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때로는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것의 부질없음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지요. 그것 역시 인생입니다. 그래서 의미는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타자는 인생에 의미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언제든 그것을 무화시킬 수 있는 존재자이니까요. 타자에 의해 회수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잘 발굴하여 인생에 심고 가꿔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고로 '황홀'은 <<도덕경>> 14장과 21장에 등장하는 노자의 용어입니다. 노자의 설명을 들으면 장자가 하는 말이 선명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시지불견명왈이 청지불문명왈희 박지부득명왈미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기상불교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시이무상지상 무물지상 시위홀황 영지불견기수 수치불견기후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라 하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분간할 수 없는 것이어서 섞여 하나로 존재한다.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뭐라고 지칭할 수 없는 승승함은 무물의 때로 거슬러 올라가니, 이것은 이른바 상황 없는 상황, 무물의 형상이며, 이를 홀황이라 한다. 맞이하려 해도 머리가 보이지 않고, 따르려 해도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날부터 관장하던 도로써 지금의 유도 다스려지니, 태고의 시작을 알 수 있다면 이를 도의 기원이라 부르겠다. - <<도덕경>> 14장



孔德之容 惟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兮 其中有象 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공덕지용 유도시종

도지위물 유황유홀 혜 기중유상 혜 기중유물 요혜명혜 기중유정 기정심진 기중유신 자고급금 기명불거 이열중보 오하이지종보지상재 이차

-공덕이 용납하는 것은 오직 도를 좇음이다. 도가 만물을 다스림은 생각할수록 황홀하다. 홀하고 황한 가운데 형상이 있고, 황하고 홀한 가운데 만물이 있으며, 고요하고 아득한 가운데 정기가 있다. 그 정기는 더할 나위 없는 참이며, 그 가운데에 믿음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만물의 처음을 볼 수 있다. 나는 어찌 만물의 처음을 알 수 있을까? 이것 때문이지. - <<도덕경>> 2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