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by 오종호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예복을 차려 입고 돼지우리를 찾아 돼지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째서 죽는 것을 싫어하느냐? 나는 앞으로 석 달 동안 너를 잘 기르고, 십 일 동안 삼간 다음, 삼 일간 가지런히 지낸 후, 하얀 띠풀을 깔고 너의 어깨 살과 볼깃살을 제기에 올려 바치려 한다. 그렇게 되어 주겠느냐?" 관리의 말에 돼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모든 개체에게는 자기만의 입장이 있습니다. 돼지에게도 돼지의 입장이 있기 마련입니다. 배불리 밥을 먹고 나면 진흙탕에서 뒹굴며 놀다가 깨끗한 물에 몸을 씻고 단잠을 즐기는 삶이 그것이겠지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제삿상에 오르고 싶어 하는 돼지는 어디에도 없겠지요.


이 우화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짓이 돼지에게 강제하는 선택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합니다. 시한이 정해진 인생을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으면 좋은 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은 사실 진정 행복한 삶과의 거리를 멀게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은 동물보다 더 끔찍합니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 현재를 충실히 살아갑니다. 동물의 삶은 우주 자연의 원리에 철저히 순응하지요. 동물이 세상에 끼치는 해악은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이성에 의해 본능을 억제하게 된 척 위선을 떨며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오갑니다. 미래에 투영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과거를 왜곡, 미화하고 현재를 포장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 과정에서 타자의 입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자에게 고통을 가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인류사 속의 인간의 잔인성은 실상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가학적인지, 인간이 얼마나 본능에 의거하여 살아가는 존재자인지를 여실히 증명합니다. 강자들을 위한 시스템의 작동을 강화하고 있는 작금의 한국 정치도 지성과 이성을 본능에 잠식당한 권력자가 사회와 국가에 얼마나 큰 위해를 가하는지 생생히 보여 줍니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으로 남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대부분의 인간이 실천하기에는 너무 엄격하고 동시에 모호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동고(同苦), Mitleid' 개념이야말로 '동고동락'을 권장해 왔던 우리의 문화와도 잘 어울립니다. '동락'하려면 '동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려면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타자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자의 쾌락도 '나'의 것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함께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먼저 '여민동고(與民同苦)' 하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여민동락(與民同樂)'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장에 나가 떡볶이나 어묵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으로 국민의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는 자는 결코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너에게, 쾌락은 나에게'가 신조인양 산 인간에게는 오직 자기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