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회가 노 젓는 솜씨가 남달랐던 사공 얘기를 꺼냅니다. 배를 모는 법도 배워서 되는 것이냐는 안회의 질문에 사공은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배 모는 법도 빨리 익히고, 잠수를 잘하는 사람은 이전에 배를 본 적이 없어도 노를 잘 저을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사공이 알려 주지 않은 그 이유를 안회가 공자에게 묻습니다.
공자가 대답합니다. "헤엄 잘 치는 사람이 배 모는 법을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은 물을 잊어 버리기 때문이다. 잠수 잘하는 사람이 배를 본 적 없이도 노를 잘 젓는 것은 못을 육지처럼 여기기 때문이요, 배가 뒤집히는 것을 수레가 뒤로 밀리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설명을 이어갑니다. "화살 던지기 시합을 할 때 기왓장을 내기로 걸면 잘 던지지만, 띠쇠(버클)를 걸면 주저하게 되고, 황금을 걸고 던지면 심란하게 된다. 솜씨는 동일하지만 아끼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지. 즉, 외물을 중히 여긴 것이다. 무릇 외물을 중시하는 자는 내면이 옹졸하다."
수영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물의 깊이를 의식하면 '행여 사고가 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몸이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노 젓는 법을 익히는데 시간이 걸리겠지요. 가치 높은 물건을 내기로 걸수록 혹시나 질까봐 하는 염려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지는 법입니다. 공자는 지금 뜻을 하나로 모아 정신의 집중을 유지하는 비결이 사물에 휘둘리지 않는 항심(恒心)에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실제 그대로의 세계인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실제라고 감지되는 현상계만 존재하니까요. 쇼펜하우어의 언어로는 인간은 표상으로서의 세계만 감지할 뿐, 의지로서의 세계는 인식 가능하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인간이 실체를 알 수 없는 맹목적인 힘(에너지, 원리)에 의해 내둘리는 존재자임을 잘 설명해 줍니다. 기쁘고 행복할 때는 그 쾌락이 머지 않아 끝날까봐 걱정하고, 슬프고 불행할 때는 그 고통이 지속될까봐 근심하는 나약한 존재자가 바로 인간이지요.
인간의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리처럼 수용할 때 우리는 외물로 인해 충발되는 감정의 실체를 포착하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우주적 질서에 포섭되어 그것의 에너지에 절대적으로 내휘둘리는 인간의 실체를 가장 먼저 통찰한 철학자입니다. 명리학적 세계관과 인간관에 가장 근접해 있는 철학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9절에는 다음과 같은 보석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항심의 유지를 위해 여러분의 가슴속에 담아 두면 좋을 것입니다.
"... 아직 무언가 소망하고 노력할 것이 남아 있을 때가 그래도 제일 행복한 법이다. 이때 소망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행복이라 불리고,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은 고통이라 불린다..."
고통은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