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by 오종호

'방일(放逸)하지 마라.' 석가모니 부처는 중생들에게 게으름을 경계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석가모니의 인불(人佛) 사상은 일생을 구도와 교화의 길에서 정진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깨달음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핑계 대지 않고, 작심삼일 대신 3년을, 30년을 하루같이 꾸준히 나아가기만 한다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은 덕담이 아닙니다. 인간 본성에 내재된 위대한 가능성의 씨앗에 대한 무한 신뢰입니다. 개발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내면의 땅을 윤택하게 가꿀 때 인간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존재자라는 사실에 대한 각성의 촉구입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 한결같이 부지런한 사람은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 주희는 부지런할 것을 권장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병이 심할 때도 쉬지 않고 자신의 일을 지속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80여 종의 책을 편찬하고, 2천여 편의 편지글과 140편의 대화록, 그리고 4백 명이 넘는 제자를 남겼습니다.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공부하라"는 그의 유언은 온힘을 다해 공부한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배우지 않고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없고, 오직 배우고 익히기를 멈추지 않을 때 인간 정신은 끊임없이 더 높은 경지를 향해 오르게 된다는 체험적 깨달음에서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일자리가 말라 가는 사회에서 하루하루 생존하기 바쁜 현대인들에게 깨달음을 향한 정진이나 쉼 없는 공부는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기 마련입니다. 종교인이나 학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처럼 느껴지지요. 현대인의 이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이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에세이를 남겼습니다.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 아래 새벽부터 노동 현장으로 내몰리며 살아온 기성세대라면 혹여 취업을 포기한 채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자식의 눈에라도 띌세라 감추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는 자극적인 제목이지요.


1935년에 출간된 동명의 책 맨 앞에 실려 있는 이 에세이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의 생산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 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불평등을 전면 해소할 수 있는 생산방식을 이미 가졌음에도 그것을 방치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뚜렷하지요.


불평등한 세상에서 토지주, 공장주와 같은 제3의 계층에 의해 신성화된 노동에 대한 비판은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목들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일이 많으며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아내도 남편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도 나이가 차는 대로 노동력을 보탰겠지만 말이다. 최소한의 필요를 웃도는 작은 양의 잉여물이 생긴다 해도 전사나 사제 집단에게 돌아갔다.'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기술을 바라보는 러셀의 시각은 AI와 지능형 로봇 기술이 인간의 노동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고 있는 현재 시점에도 유효합니다. '현대의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와 같은 내용이 그것입니다. 러셀에 따르면 인류는 1930년대에 이미 모두가 충분한 여가를 즐겨도 좋을 만큼의 기술을 확보했다는 것입니다. 노동 시간의 감소를 통해 저마다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고 과잉 생산을 조절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식은 다음 구절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부자들에겐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여가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러셀의 통찰을 살피면, 문제는 기술도 아니고 노동도 아닌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임이 분명해지지요. 더 정확하게는 그것을 운용하는 국가별 정치 권력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기술에 의해 노동이 소멸되어도 오히려 사회 생산력은 더 증가할 것입니다. 그것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분배에 대한 정치 권력의 결정이 미래 시민의 생존을 좌우할 것은 자명합니다. 따라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를 신봉하는 정치 권력의 지배를 용인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서 시민의 참정권은 매우 자주 자신의 기본권을 축소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정책을 펴는 세력을 향해 행사되어 왔습니다. 중우 정치가 반복되는 한 그것을 통해 손쉽게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자들이 다수의 평등을 위한 정책을 펼 리 만무합니다.


오직 사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정치 권력은 그것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이익 앞에서 그들의 사전에 게으름은 없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부지런히 이익을 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속아 넘어가는 우중이 한가득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을 위한 정책을 연구하는 데는 한없이 게으릅니다. 원래 사람은 마음이 가지 않는 것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 법이지요.


정치 권력이 사유화될수록 시민이 피해를 봅니다. 한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분주히 몸을 움직여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사회적 안전 장치의 미비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노동 소외의 불안을 강요합니다. 불안할수록 개인은 공동체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느라 점점 더 어리석은 대중으로 전락해 갑니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더 높은 정신을 위해 올라가야 합니다. 게으름 부리지 말고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사유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힘으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의 건설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석가모니와 주희의 뜻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를 가져야 우리는 마음껏 게을러도 불안해할 필요없는 미래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성한 노동이라는 날조된 구호에서 벗어나 지구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기쁨을 만끽하는데 부지런한 고차원의 문명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일하는 소수에 짓밟힌 채 치욕적으로 연명하는 노예의 삶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방일의 사전적 의미는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방탕하게 놂'입니다. 주가를 조작하고, 고속도로 노선을 휘게 하며, 명품백을 받는 등의 방일함이 유야무야되는 세상은 노예 사회의 전단계입니다. 노예 사회로의 진입을 위해 바삐 위선의 펜을 놀리는 언론의 근면함과 사방팔방 쏘다니며 공수표를 남발하는 정치 권력의 뻔뻔함을 비웃으며,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 깨어 있는 시민의 위대한 힘을 보여 줘야 합니다. 광자(狂者)들의 방일을 이제 그만 중단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