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과 사람들
세월은 인간을 망각하게 한다. 굳건했던 약속도, 절절했던 마음도, 시간의 강물 앞에서는 설탕처럼 녹아 없어지고 만다.
사랑도 의리도 없이 다만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국제 관계 하의 동맹이란 해변의 모래성 같은 것. 파도가 밀려오는데 곧 허물어질 모래성을 가리키며 가치 동맹을 부르짖어 봐야 유니버설 호구 취급만 받을 터.
먼저 계산기를 두드린 것은 제나라와 위나라였다. 진나라에게 속았다는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들은 15년간 잠잠했던 바다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음이 분명하다.
제와 위가 공격하자 열 받은 조나라 왕. 소진을 불러 어찌된 것이냐며 심하게 질책한다. 자칫 엿 되겠다 싶었던 소진이 상황을 바로잡겠다고 말하며 연나라로 향하지만, 6개국 간의 합종 맹약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진나라 혜왕은 연나라를 타겟으로 삼았다. 자신의 공주를 연나라 문후의 태자비로 보낸 것이다. 문후가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주역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변덕이 죽 끓듯 했기 때문인지, 그는 훗날 역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국상을 치르느라 어수선한 시국을 틈타 이웃한 제나라가 침공하여 10개의 성을 빼앗자 격노한 역왕이 소진을 호출한다. 슬슬 동네북이 되어 가는 중인 소진. 하지만 그의 세치 혀는 여전히 촉촉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빼앗긴 성들을 되찾기 위해 제나라를 찾은 소진, 다시 혀에 시동을 건다.
"연나라는 작고 힘이 약하지만 진나라의 사위국입니다. 전하께서 연을 쳐서 땅을 빼앗았으니 어찌 진나라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헐, 그렇군. 어찌하면 좋겠소?"
제나라 왕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을 놓치지 않고 소진은 몰아친다.
"성을 돌려주고 사과하시면 됩니다. 그럼 연나라는 악감정을 풀고 기뻐할 것이요, 자신의 배경 덕임을 아는 진나라 역시 흐뭇해 할 것입니다."
소진이 빼앗긴 영토를 회수하는 동안, 연나라 조정에서는 소진에 대한 음해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능력이 뛰어나 큰 영예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적이 생기기 마련. 시기와 질투는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들의 생존 본능이자 생활 동력이니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으나 역왕이 업무를 맡기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하자 소진이 만나기를 청하여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무원 남편이 지방에 간 사이 그의 본부인이 외간남자와 정을 통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돌아올 시기가 되자 그녀는 독을 탄 술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온 날 그녀는 남편의 첩에게 그 술을 내어 주었습니다. 첩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요. 남편에게 사실대로 얘기하면 본부인이 벌을 받을 것이고 침묵하면 남편이 죽을 것이기에, 첩은 술상을 들고 방에 들어가다가 일부러 발을 헛디뎌 술을 다 엎질러 버립니다. 본부인도 살리고 남편도 살렸지만 본인은 남편에게 몽둥이로 50대나 맞아야 했지요."
'너한테 누가 나보고 신용 없는 놈이라고 했지? 야, 생각해 봐라. 증삼 같이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네 신하라면 부모를 떠나 너를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닐 수 있겠니? 백이처럼 자기 절개 지키는 게 중요한 사람이 네 신하라면 다른 나라들을 다니며 온갖 스토리로 구워 삶을 수 있겠어? 여자하고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해서 홍수로 불어난 물을 피하지 않고 기다리다 죽은 미생 같이 미련하게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네 신하라면 제나라에서 영토를 되찾아 올 수 있었겠냐? 충성, 신용, 이런 거 말야. 따지고 보면 다 자기의 도덕적 명성 때문에 하는 거야. 나는 진취적인 행동가야. 이런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충성하고 신용을 지킨다고. 비록 그 과정에서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될지라도 말이야.'
이런 취지의 직설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말귀를 못 알아 듣던 역왕에게 불륜과 살인 청부, 가정 폭력을 섞은 스토리텔링을 해주자 그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께서 본래의 직위를 맡아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