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호 글 · ChatGPT 4o 그림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아내는 예전의 생활 패턴으로 바로 복귀했다. 통조림의 뚜껑을 채 따보기도 전에 영진은 부부간의 사랑이 간직하고 있던 맛을 모두 알아 버린 기분이 들었다. 영진이 회사 일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피곤한 얼굴로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아내를 위해 꿀물을 타주거나 다리를 주물러 주는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는 것은 즐거움과 거리가 있었다.
영진은 무서운 집중력과 속도로 업무를 처리했고 성과는 탁월했다.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은 저녁에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을 배양하기 위한 각종 온라인 교육 및 자기계발 서적에 탐닉해 들어갔다. 영진의 승진 속도는 눈부셨고 동기와 후배들은 그런 영진을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렀다. 낙하산을 제외하고 서른 다섯의 나이에 기획팀장의 위치에 오른 것은 회사 창립이래 최초라고 했다. 돈 잘 버는 부인과 그런 아내가 뽑아준 외제차, 고급 아파트, 그리고 회사에서의 승승장구는 영진을 뭐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훌륭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영진은 회장의 호출을 받고 올라간 회의실에서 받은 제안을 즉석에서 수락했다. 회장은 미래의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새로운 실험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그룹사를 망라하여 간부급 인재들을 모아 각자의 전문성을 자유롭게 발휘하게 함으로써 기존에 없던 새로운 수익 모델들을 개발하는데 아낌없이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최고의 인재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창의적인 인재들이 제한 없는 상상을 하고 그것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원들의 반발을 원천봉쇄 할 수 있도록 별도의 법인을 설립하여 특별 대우하겠다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영진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회장의 장황한 말은 화려했지만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영진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열어보라고 재촉할 때 그의 말은 매력적으로 이해되었다. 가방 안에는 5만원짜리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승선 대가라고 회장은 말했다. 최소 2년간 가방 안에 든 금액만큼의 연봉과 보너스를 보장한다고 했다. 보너스는 통장에 찍히는 월급과는 별개로 연봉의 합계에 해당하는 금액을 별도로 지급하는 것이라고 했다. 설사 중간에 천재지변으로 인해 프로젝트가 중단된다고 해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계약금 5억원과2년간의 연봉과 보너스를 합해 총액 25억원이 보장된 제안이었다. 그리고 임무를 완료할 시 성과급 25억원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임무에 대한 얘기는 추가로 할 것이라고 했다. 돈은 기본이고 기대에 부응할 시 그 보다 더 짜릿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회장이 무엇을 하려는 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받아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거절하는 순간 돈은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었고, 기분이 상한 회장이 자기의 회사 기획실에 놓여 있는 책상 하나를 없애는 것은 파리 잡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프로젝트 법인으로의 이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인트라넷을 통해 미래전략실의 역할을 담당할 신생 자회사의 출범을 알리는 회장의 비장한 각오가 장황하게 공지되었다. 전 그룹차원의 브레인 기능을 수행할 신개념의 미래가치창조 조직으로서 모기업은 물론 전 계열사의 핵심 인재들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직 대상자의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총 33명이라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며칠 후, 예정된 각본대로 기획실장 박전무는 기획실 직원들을 대상으로 영진의 퇴사를 공표했다. 영진은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직원들의 놀란 눈들을 상대했다. 박전무는 영진의 개인 사정상 송별회를 생략하기로 했다는 말을 끝으로 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팀원들은 영진의 주위에 몰려들어 어찌된 일이냐고 캐묻기도 하고, 어떻게 자기들에게 아무런 말없이 회사를 떠날 수가 있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미래전략실의 인재로 발탁하지 않은 임원들의 무능에 대해 그렇게 감정적인 대응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누군가의 질책성 질문에도 영진은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나중에 술 한잔하며 얘기하자는 대답과 함께 자신의 짐을 챙기는 것으로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주차장까지 따라 나온 팀원 몇 명과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영진은 공식적으로 짧았지만 화려했던 직장 생활의 한 장을 마감했다. 결혼한지 2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