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호 글 · ChatGPT 4o 그림
오전에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이 개설된 은행 두 곳을 제외한 다른 은행 두 곳에 들러 각 2억 5천만 원씩 예치한 영진은 회장이 건넨 돈 가방에 들어있던 주소로 차를 몰았다. 도착 예정 시각은 오후 2시였다.
열린 차창을 파고 들어 코끝을 간질이는 따스한 봄바람이 오랜만에 자유인으로서의 쾌감을 선사했다. 기분이 상쾌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직 보너스, 그리고 보장된 높은 연봉은 웬만한 직장인이 단기간 내에 모으기 어려운 목돈이었다. 그룹 전체가 사활을 걸고 육성할 조직 멤버 33명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는 자부심은 그런 기분에 콧노래를 더하게 만들었다. 2년 후에 조직이 와해되더라도 2년간의 고생을 마치고 나서 확보된 돈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나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봄 냄새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산이 벽처럼 눈앞을 가로막고 선 한적한 국도 변의 샛길을 따라 1km를 더 들어간 곳에서 내비게이션은 도착을 알렸다. 차 앞으로 차단기가 가로로 길게 누워 있었다. 차단기 너머로 이어진 도로 끝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고, 도로 위의 화살표는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에서 5초 정도 대기하자 갈림길 사이 정 중앙의 잔디밭에 설치된 전자알림판이 말과 글로 안내해 주었다.
- 정영진님 환영합니다. 잠시 후 오른쪽 길로 진입하여 안내판을 따라 이동해 주십시오.
이윽고 차단기가 올라가고 영진은 아스팔트 위의 화살표와 안내판의 지시를 따라 우회전해 들어갔다. 1차선 도로 양쪽으로는 사철나무가 빈틈없이 빽빽하게 심어진 채 벽을 이루고 있어서 도로의 정면 외에 차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50m 간격으로 설치된 안내판마다 영진을 환영하고 있었다. 세 번째 안내판을 지나자 기계식 주차장 입구를 닮은 건물 하나가 터널처럼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차량 한 대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났고 공간의 맞은편 벽에 ‘진입한 후 차량의 시동을 끄고 대기하세요’라는 메시지가 보였다.
시동을 끄자 등뒤에서 문이 닫히는 모습이 룸미러를 통해 보였다. 문이 닫히자 영진의 차를 품은 공간은 엘리베이터처럼 부드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센서에 의해 저절로 작동되는 듯했다. 1층, 2층, 3층… 영진은 자기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감안하여 깊이를 계산하고 있었다. 영진의 계산이 맞다면 엘리베이터는 7층 깊이의 지하에 내려온 셈이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수직 이동을 끝낸 엘리베이터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움직임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번엔 좌측으로 길게 이동했다가 다시 전진하여 얼마쯤 더 이동하더니 마침내 정지했다. 차량의 시동을 걸라는 안내 메시지가 문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윽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거리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폐쇄 공간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영진은 자기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우주 공간처럼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낯선 세계가 똬리를 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차의 전조등은 어둠 너머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어둠은 벽처럼 버티고 서서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정면 바닥에 하얀색 빛으로 원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면 영진은 도저히 차를 몰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상황과 크기로 미루어 동그라미는 주차 구역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영진은 조심스럽게 원을 향해 나아갔다. 타이어에 와 닿는 바닥의 감촉에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차가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원은 넓었다. 운전석 창문 너머로 하얀색 선까지 넉넉한 공간의 여유가 느껴졌다. 순간 하얀색 원을 그렸던 바닥의 불빛도 사그라지기 시작해 이윽고 영진은 크기와 깊이를 상상할 수 없는 완벽한 어둠 한가운데 방치되었다. 마치 우주 공간에 홀로 버려진 조종사처럼 아득한 고독이 느껴졌다.
- 시동을 끄세요
정면의 어둠에서 빨간색 글귀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구원의 메시지라도 되는 양 친절하게 정확히 세 번 깜빡이고 나서 사라졌다. 사위는 다시 별을 닮은 희미한 불빛 하나도 없는 완벽한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둠은 석유 찌꺼기처럼 끈끈한 액체와도 같았다. 차창을 열면 금방이라도 익숙한 냄새를 동반한 석유가 콸콸거리며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았다.
마치 영진의 차가 시동 걸릴 때의 중후한 저음을 닮은 기계음과 함께 눈앞의 어둠은 세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빛은 어둠의 캔버스를 단숨에 자른 힘 그대로 차와 영진을 두 동강이 낼 듯 날카롭게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빛은 속도를 늦추면서 차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옆으로 비켜섰고, 어둠이 가로막고 서 있던 자리를 영화관 스크린처럼 좌우로 길게 넓혀 놓았다. 빛에 눈이 익자 빛 안쪽에 자리잡고 있던 공간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물들이 눈으로 파고들었다. 빛이 열어 놓은 공간의 끝에서 세로로 긴 통 유리창이 공간을 끝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