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 중대부 수가의 수행원으로 제나라에 머물던 범저. 그의 실력에 대해 들은 바 있던 제나라 양왕이 금과 소고기, 술 등을 선물로 내렸으나 범저는 사양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가는 범저가 국가 기밀을 누설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귀국 후에 재상 위제에게 제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일러 바친다. 크게 노한 위제는 범저를 매질하여 대자리로 말아 뒷간에 던져 버리게 했다. 취한 빈객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는 범저의 몸에 소변을 보았다.
"이보시오. 나 좀 풀어 주시오. 나를 풀어 준다면 내 반드시 크게 사례하리다."
이 말을 들은 보초는 범저가 죽었다고 거짓 보고를 올리고 시신을 버리는 척하여 범저를 놓아 준다. 범저는 장록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은신한다.
정안평의 도움으로 진나라 사신 왕계의 눈에 들어 진나라로 넘어간 범저. 진 소왕을 알현하여 유세할 기회를 얻고자 하였으나 진나라 왕은 자국의 상황을 누란지위(累卵之危)로 비유한 범저를 부르지 않는다. 기회는 실력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법. 당시 진나라의 실권은 소왕의 모후인 선태후의 동생 양후가 잡고 있었는데, 그는 진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제나라의 공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왕계의 간언으로 마침내 자신을 부른 진나라 왕을 마주한 범저. 그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책을 수용한 소왕은 선태후를 폐하고 양후를 내쫓은 후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다.
진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는 수가를 사신으로 파견한다. 범저가 낡은 행색을 하고 객관으로 찾아오자 그가 살아있음에 놀라면서도 수가는 그를 가여이 여겨 비단 도포 한 벌을 내어 준다.
"내가 듣기로 장록 대감이 진나라의 실권자라 하는데, 자네 혹시 장록 대감에게 선을 댈 만한 사람을 알고 있는가?""제가 모시는 주인께서 알고 계십니다."
큰 수레를 빌려 와 수가를 태우고 직접 말을 몬 범저는 관저에 이르자 상부에 보고하겠다며 사라진다. 한참이 흘러도 범저가 나오지 않자 수가가 문지기에게 범저의 행방을 물었다.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온 범저라는 사람이 왜 아직 나오지 않는 겐가?"
"범저요? 그 분은 우리 재상이신 장록 대감이신데요?"
아뿔사.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는 수가 앞에 휘황찬란한 옷으로 갈아입고 종들을 대동한 범저가 나타났다. 수가는 머리를 조아리며 죽여 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너의 죄가 몇 개인 줄 아느냐?"
"제 머리카락을 뽑는다 해도 다 헤아리지 못할 것이옵니다(탁발난수擢髮難數)."
자신을 모함했던 죄를 묻는 대신 범저는 수가가 옛정을 생각해 비단 도포를 내어 준 사실을 들어 석방하고 그의 일처리를 돕는다. 하지만 범저는 은혜는 반드시 갚고 원한은 기어이 푸는 사람이었다. 수가가 위나라로 돌아가는 날, 범저는 각국 사신들을 모두 초대하여 연회를 연다. 그리고 수가만은 대청 아래에 앉힌 후 말 여물을 강제로 먹이며 말했다.
"위나라로 돌아가면 위제의 목을 보내라고 왕에게 전하라."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한 범저의 위세도 그가 추천한 정안평과 왕계의 실책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채택이라는 자가 범저를 찾아온다.
"대감, 속담에 '해가 중천에 뜨면 기우는 법이고 달도 차면 이지러진다(일중즉이 월만즉휴日中則移 月滿則虧)'고 했습니다. <<역경>>에 '높이 올라간 용에겐 후회할 일이 생긴다(항룡유회亢龍有悔)'고도 하였지요. 제가 보기에 지금이 대감께서 물러나실 때인 듯하옵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범저는 병세를 핑계로 재상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훗날 재상의 자리에 오른 채택 역시 주위에서 자신을 헐뜯는 자들이 생기자 병을 핑계 삼아 재상의 지위를 스스로 버린다.
인간사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을 꿈꾸면 몰락이 시작된다. 영원한 절대 권력을 탐했던 윤석열과 김건희. 그리고 그들에게 기생해 권력의 단꿀을 빨고자 했던 어리석은 자들의 자멸은 이 진리를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