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적 인간>>을 읽어야 하는 많은 예들 중의 하나
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 車之用 挻埴以爲器 當其無有 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 室之用 故 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삼십복공일곡 당기무유 거지용 선식이위기 당기무유 기지용 착호유이위실 당기무유 실지용 고 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한 개의 바퀴통을 향하는데 무와 유가 균형을 이루기에 수레가 쓰이게 된다. 찰흙을 반죽하면 그릇이 되는데 무와 유가 균형을 이루기에 그릇이 쓰이게 된다. 문과 들창을 뚫으면 방이 되는데 무와 유가 균형을 이루기에 방이 쓰이게 된다. 그러므로 유는 이가 되고 무는 용이 된다.
널리 알려진 내용이지만, 기존의 해석들은 노자의 마음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무無는 '비어 있음emptiness'이 아니다. 그 뜻으로 쓰인 글자는 4장의 충沖과 5장의 허虛, 그리고 21장의 공孔이다. 이 장은 결코 비어 있음을 예찬하는 따위의 내용이 아니다. 이 장의 핵심은 유는 이이고 무는 용이라는 마지막 문장에 담겨 있다. 곧 이용利用에 관한 얘기다.
이 장은 고故를 기준으로 하여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수레, 그릇, 방이 어떻게 쓰임을 얻게 된 것인지 얘기한다.
'당기무유 거지용'이라고 끊어 읽어야 한다. 무와 유는 한 쌍이다. 무유無有는 19장과 43장에도 쓰였다. 유무有無는 2장에서 딱 한 번 쓰였다. 무유가 이상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조를 인식하고 풀이해야 맨 마지막 문장으로 향하는 노자의 뜻을 알 수 있다.
당當은 술어로서 '균형 잡히다, 균형을 이루다'의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무와 유가 균형을 이루기에 수레가 쓰이게 된다'는 뜻이 된다. 기其가 가리키는 것은 바큇살과 바퀴통이 아니라 앞 문장 전체다. 즉, '바큇살 서른 개가 바퀴통 하나에 모이는 과정에서' 정도의 뉘앙스다. 그렇기에 굳이 '그, 그것' 이라고 풀이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당기무유 기지용'과 '당기무유 실지용'에서의 '기'도 각각 '찰흙으로 반죽하는 과정에서'와 '문과 들창을 뚫는 과정에서'의 뉘앙스를 갖는다.
이제 무와 유, 이와 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서른 개의 바큇살과 한 개의 바퀴통은 유다. 수레도 유다. 바큇살과 바큇살 사이에 추가될 수 있었던 여분의 바큇살이나 바퀴통은 무다. 무와 유가 균형 잡히지 않았다면 수레는 제대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과 한 개의 바퀴통으로 구성된 네 쌍의 바퀴 세트는 수레를 움직이는 이로움을 만들고, 수레는 움직여 사람과 짐을 나를 수 있게 해주는 이로움을 주관한다. 반면에, 있을 수 있었으나 있지 않은 상태로 남은 여분의 바큇살과 바퀴통은 서른 개의 바큇살과 한 개의 바퀴통으로 조합된 바퀴가 잘 작동하여 수레가 굴러갈 수 있도록 해준다. 무가 쓰임(用)을 만들고, 유가 이로움(利)를 제공하는 것이다.
찰흙은 유다. 반죽하는 행위와 그릇도 유다. 사람에게 음식을 담아 먹게 하는 이로움을 준다. 더하거나 덜 수 있었던 찰흙과 가하거나 감할 수 있었던 힘이나 열기 등은 무다. 두께, 깊이 등에 변화를 일으켜 용도에 맞지 않는 모양의 그릇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문과 들창은 유다. 출입과 환기, 전망 등의 이로움을 준다. 방 하나에 문 두세 개, 들창 네다섯 개를 만들 수도 있다. 위치도 뒤죽박죽일 수 있다. 만들 수 있었지만 만들지 않은 문과 들창들로 방은 방의 쓰임을 얻는다. 무와 유의 균형 덕분이다.
우리는 1장과 2장에서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와 ‘유무상생’이라는 표현을 각각 배운 바 있다. 무에서 유가 나온 것이다. 무의 용이 있어 유의 이가 가능한 것이다. 노자는 지금 이것을 말하고 있다. 유를 볼 때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그 이전의 무와 유의 균형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결국 천지의 무위의 작용력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도를 이해시키기 위해 8장에서 물을 끌어왔듯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 수레, 그릇, 방을 예로 삼은 것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노자는 비움의 가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오관은 유만을 감각한다. 이로움, 유익함, 이익을 얻기 위해 만든 세상의 수많은 유는 인위적이다. 인간만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것이 자리한 곳에 존재했을 수도 있는 무를 생각해 봐야 한다.
2장에서 노자는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의 기준에 맞추어,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에 따라 무위로 그 자리에 실재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현 인류 앞의 유는 수레, 그릇, 방 수준이 아니다. 무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허물고 이익이라는 잣대로 허상의 인위를 세우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생生이 아니라 사死의 선택이다. 장기적 안목에서 보면 AI 연구, 마지막 갯벌 '수라'의 개발, 후쿠시마 핵 페수의 방류 등이 다 생이 아니라 사의 방향을 택한 인위다.
무와 유의 균형이 깨진 시대, 인간에게는 현명해질 시간이 남아 있을까? '이용하다'의 첫 번째 사전적 정의는 '대상을 필요에 따라 이롭게 쓰다'이다. 인간, 그것도 극소수의 인간의 필요에 따라 대상을 함부로 쓰는 대신 생명 전체의 필요에 따라 그야말로 이롭게 써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이용하다'의 두 번째 사전적 정의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을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쓰다'이다.
아래의 내용은 굳이 책에는 싣지 않았지만, 위의 해석이 타당함을 보여 주는 문법적 분석이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 車之用
挻埴以爲器 當其無有 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 室之用
그릇과 그릇, 방과 방의 대응과 달리 첫 문장에서는 바퀴통과 바퀴통의 관계가 아니다. 만일 뒤에도 바퀴통이 나왔다면 기존의 해설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대로 무(無)를 '비어 있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가 생길 수 있다.
三十輻共一轂以爲車 當其無有 車之用
挻埴以爲器 當其無有 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 室之用
노자가 무를 '비어 있음'의 의미로 쓰고자 했다면 첫 문장은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한 개의 바퀴통으로 모여 수레가 되는데, 수레가 비어 있기에 수레가 쓰이게 된다'고 말이다.
노자는 혹여라도 독자들이 무를 오독하지 않도록 원문과 같이 첫 문장을 구성한 것이다. 무를 '비어 있음'이라고 해석하고 제아무리 의미를 부여해 봤자 그렇게 해서는 '유는 이가 되고 무는 용이 된다'는 문장의 깊은 의미가 살아나지 않는다. <<도덕경>> 전체 텍스트의 맥락과도 맞지 않는다.
노자라는 스승에게서 무엇인가를 깨우쳐 지금보다 더 높은 정신 수준으로 올라서고자 한다면, 학자(<<도덕경>>연구자)들의 말과 글을 맹종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다른 모든 텍스트를 대할 때도 공통적으로 적용해야 할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