彖曰 蒙 山下有險 險而止蒙 蒙亨 以亨行 時中也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志應也 初筮告 以剛中也 再三瀆瀆則不告 瀆蒙也 蒙以養正 聖功也
단왈 몽 산하유험 험이지몽 몽형 이형행 시중야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지응야 초서곡 이강중야 재삼독독즉불곡 독몽야 몽이양정 성공야
-<단전>에 말했다. 몽은 산 아래에 험한 것이 있는 것이다. 험하여 그치는 것이 몽이다. 몽이 형통한 것은 형통하게 행하고 때에 맞기 때문이다. '나만 동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도 나를 찾는 것'은 뜻이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처음 점을 치면 뜻을 청하는 것'은 강중으로서 하는 것이고, '두 번 세 번 점을 치면 더럽히는 것이고 더럽히면 알려주지 않는 것'은 몽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바름을 기르는 몽이야말로 성인을 만드는 공이다.
앞의 괘사를 이해하고 간괘와 감괘의 상을 알고 있으면 특별히 어려운 대목이 없습니다.
강은 곧 양陽이고 중은 득중을 말하는 것으로 강중剛中은 산수몽괘 구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차례로 보겠지만 산수몽괘에서 정응의 관계에 있는 구이와 육오 중에서 구이는 스승이요 육오는 동몽, 곧 제자입니다. 외괘 간괘는 소남小男을 뜻하니 여기에서 제자의 상이 나옵니다.
처음 점을 쳐서 하늘에 뜻을 청하면 하늘이 응답하여 답을 내리는 것처럼, 제자가 질문하면 스승은 밝은 가르침을 건네야 합니다. 그래야 스승인 것이지요. 귀찮다고 화를 내거나 본인도 모르면서 똥폼이나 잡아서는 좋은 스승일 수 없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서 함께 답을 찾아보자고 인자한 미소를 건네는 스승의 이미지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실상은 스승 흉내를 내는 개떡 같은 놈들 천지지요. 교수라는 직위를 곧 스승으로 착각하는 자들도 참 많습니다.
대신, 진짜 참다운 스승에게 배우고 있다면 설익은 지식으로 가르침을 회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질문에 스승이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대답하는 경우, 얼치기 제자는 그것을 스승의 실력이 부족한 근거로 삼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서로 뜻이 잘 맞아야(志應) 하는 것이겠지요.
象曰 山下出泉蒙 君子以 果行育德
상왈 산하출천몽 군자이 과행육덕
-<대상전>에 말했다. 산 아래에서 샘이 솟는 것이 몽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멈추지 않고 행하며 덕을 기른다.
<단전>에 '몽이양정 성공야'라고 했지요. 바름을 기르는 교육을 하면 몽매한 자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샘물은 미약합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을 보면서 그 물이 흘러흘러 바다에 이른다는 것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샘물은 반드시 바다에 도달할 테지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씨앗에서 출발하여 지난한 세월을 거쳐야 합니다.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은 곧 과정을 건너뛰지 않고 충실히 밟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과행果行'을 저는 묵묵히 행하는 것, 멈추지 않고 행하는 것으로 봅니다. 샘물의 여정에서 제가 받는 느낌입니다.
한가지 더 우리가 산 밑의 샘물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것의 근본적 속성(元)이 맑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아기가 가능성의 존재인 이유 역시 맑음에 있습니다. 바름을 기르는 교육이란 그 맑음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타고난 처음의 맑음을 더욱 흐리는 흙탕물 같은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아울러, 근본이 맑은 사람은 일시적으로 탁해져도 다시 본성을 회복합니다. 샘물의 가장 큰 미덕은 솟아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 있지요. 맑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맑은 사람은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지요. 샘물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