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XVI

by 오종호

허기는 자는 동안에 못 견디게 밀려왔다. 희미한 창 밖 조명에 의지하여 더듬어 찾은 딱딱한 햄버거를 은희는 걸신들린 듯 먹어 치웠다. 하루 분의 끼니는 그런 식으로 처리되었다. 좁은 창에 어렴풋이 비치는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얼굴의 감촉은 기름기 하나 없이 푸석거렸다. 마음을 다져도 눈에서 자주 눈물이 흘렀고 눈물이 마를 때쯤이면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은희는 자주 잤다.

하루에 한 문제라는 조건이 숨이 막혔다. 날마다 다 맞춘다고 하더라도 총 백일을 견뎌내야 했다. 어제처럼 간단하지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한 층을 후퇴했을 때의 절망 앞에서 은희는 극복할 수 없는 무력감에 젖었다. 언제 어느 날 또 그런 식의 문제가 나올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우울을 증폭시켰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는 것, 더욱이 진짜 삶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어진 기억 속을 집요하게 헤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은 은희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동네를 산책할 때 지드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어디였나요?”


10일 내내 지드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던 화면에는 어제 틀렸던 문제가 다시 떠올라 있었다. 질문을 보는 순간 은희의 가슴 속에서 분노가 일었지만 화를 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칫 거꾸로 계속 내려갈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맞추지 못할 경우 수감시간은 끝도 없이 길어질 수 있었다.

은희는 심호흡을 하며 침대 위로 올라가 정 중앙에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기억을 박박 긁어서라도 끄집어내야 했다.


지드의 길고 흰 꼬리가 힘 있게 서서 좌우로 살랑거렸다. 지드의 등에서 뻗어 나온 끈의 끝에 민성의 손이 있었다. 휴일 늦잠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베란다에서 바깥 공기를 쐬고 있을 때 아파트 아래에서 공원을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 민성과 지드의 모습이 보였다. 공원은 어제의 답이었다. 이미지로 남아 있는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은희는 지드의 커다란 덩치와 언제나 좋다고 달려드는 미련스러움이 싫었다. 무엇보다 지드에게서 전해지는 민성의 냄새와 이전 주인에게서 학대 받고 버려진 지드의 출신에 정이 가지 않았다. 민성과 지드는 버려진 존재들이었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에 소용될 구석이 없어서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존재들끼리의 우정은 값싼 소설의 소재로나 적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면 자기가 버려질 것이었다. 은희는 민성이 지드와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무엇이든 건져 올려야 했다.


회식 후 자정을 넘겨 들어갔던 날이었다. 변함없이 달려 나와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는 지드를 외면하고 침실로 걸어갈 때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민성이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렇게 좋다고 하는 아이를 외면하고 싶냐?”


맥주 캔 몇 개가 소파 옆 테이블에 찌그러져 있었다.


“싫다고 하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사람이나 개나 똑 같은 것 아닐까?”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곧바로 받아 친 은희의 답변에 민성은 남은 맥주를 털어 넣은 다음 소파에서 일어나 지드를 안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내일 나가서 서류 보낼게. 지드가 시장 산책을 못해서 서운하겠지만 금방 적응하겠지. 미안하고 고마웠다. 잘 살아.”


자판을 눌러 ‘시장’이라고 입력했다. 화면이 정답이라고 축하해 주었다. 은희는 자기도 모르게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침이면 다시 10층으로 올라가 있을 것이었다. 더 이상은 지드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기를 은희는 간절히 바랐다. 아직도 90층이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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