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뻐꺼지는 왜 안 오고, 부사장님은 여기 무슨 일이세요?”
방글라는 자기가 연극배우의 꿈을 꾸고 대학로 바닥에서 찌라시를 돌린 지 어언 20년이 넘었는데 20년 동안 외워서 읊은 찌라시만 해도 수천만 장은 된다고 했다. 근묵자흑이라더니 뻥카와 가까워진 방글라 다웠다. 여하튼 대학로 인맥의 도움을 받아 시바르를 갈궈서 사표 쓰고 나가게 하기 위한 인물을 물색했지만 괜히 기밀이 새나갈 염려도 있었고, 시바르를 정확히 알지 못할 경우 대본이 없는 연기를 실수 없이 수행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뻐꺼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도통한 인물답게 뻐꺼지는 맡은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는데 나중엔 시바르를 괴롭히는 재미에 푹 빠져서 ‘자발적 노동유연화에 해당될 수 있도록 현명한 조치’라는 목표는 깜빡했다는 것이었다.
부사장이 안경을 벗고 나서 얼굴에서 피부를 뜯어내자 허물을 벋은 나비처럼 뻐꺼지가 앉아 있었다.
“야, 이 개 시바르 조또 새끼야.”
시바르의 입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최선의 욕설들이 터져 나와 동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시바르를 피해 도망다니는 뻐꺼지와 시바르를 보며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고 나서 눈물까지 닦고 난 뻥카가 시바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시바르. 어차피 우린 이곳에 아무도 없다. 주전자는 술만 많이 준다면 무조건 간다고 했고, 뻐꺼지는 학원 정리했고, 방글라는 꽃미남 소리 듣는 곳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네가 좀 느리긴 하지만 내 둘째 부인이 연출된 가짜라는 것은 이제 대충 알았을 테고. 이제 너만 남았다. 그 가방엔 5억원이 들어있다. 우리와 함께 간다면 그것은 네 가족에게 네가 선물로 남길 수 있는 돈이다. 여기 있는 우리 각자도 각자의 삶에서 고마웠던 사람에게는 누구든 자유롭게 이 돈을 선물하고 내일 아침 첫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다. 비행기표는 돈 봉투에 함께 들어있지. 결정은 너의 몫이다. 우리의 맹세가 있었던 이곳에서 너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럼 내일 아침 공항에서 다들 만나는 것으로 하고 서두르자. 시바르, 어떤 선택이든 우리는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다만,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우리 다 함께 오푼이 주제가 부르고 헤어지자.”
시바르는 뻥카의 재혼식이 가짜였다는 것에도 충격을 받았지만 오늘 당장 내리는 결정이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시바르의 생각엔 아랑곳없이 방글라가 노래를 선창하고 모두들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동굴 안엔 그 옛날 그 밤에 즉석 작사 작곡되어 단 한번 불리어졌던 희한한 노래가 오랜 세월을 건너뛴 채 다시 불려지고 있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뭘 하고 살까나.
인생은 양푼비빔밥, 우리 한데 섞여 살아보세.
너는 보리밥, 너는 고추장, 너는 콩나물, 너는 애호박, 너는 고사리.
나는 뻥까, 나는 시바르, 나는 주전자, 나는 뻐꺼지, 나는 방글라.
우리는 오푼이,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깝다네.
먼저 성공하면 형제들 잊지 마세.
먼저 돈 벌면 형제들 살게 하세.
우리는 오푼이 영원한 벗이라네.
시바르는 25년만에 부르는 이 노래의 가사와 가락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노래를 부르며 가슴이 먹먹해져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술도 안마시고 뻐꺼지는 벌써 펑펑 울고 자빠지려고 하고 있었지만, 시바르는 어떡하든지 눈물만은 참고 싶었다. 시바르는 냉철한 의사결정을 해야만 하는 유일한 존재였던 것이다. 평소의 자신과는 좀체 어울리지 않지만 시바르는 생각을 뒤로 미루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다음과 같이 인생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내가 없어도 와이프는 잘 살 거야.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한 여자니까. 이제 더는 물에 찬밥 안 말아 먹어도 되잖아. 아이들도 많이 컸다. 머지 않아 자기들 인생을 찾아가게 될 거야. 그래, 다들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지만 내가 이곳에 남게 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기존의 인생은 멈출 것이며, 앞으로 나아갈 인생도 없게 된다. 그 책 제목이 뭐더라. 그, 그, 그래, 그거!’
다음날 이른 새벽, 시바르는 5억원하고 책 『달과 6펜스』가 든 가방과 친구들이 모아준 4억원이 든 또 하나의 가방을 거실의 정중앙에 내려놓고 현관문을 나섰다. 하나의 인생이 저물려 하고 있었다. 아주 나쁘지 않았지만 다시 경험하고 싶지도, 계속 이어가기도 싫은 삶이었다. 또 하나의 인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미지의 땅으로 데려다 줄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벗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