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경작하라.
반기지 않음에도 절망은 기어이 삶의 곁으로 다가와 세상의 풍경을 한줌의 빛도 건질 수 없어 보이는 암흑 속에 가둬 버리곤 합니다.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해 본 적 있는 사람은 희망이 얼마나 구체적인 단어인지 알지요. 칠흑의 허공에서 손발을 휘저으며 낙하하는 동안, 희망이란 곧 바닥에의 도달을 뜻합니다. 바닥에 닿고서야 추락은 멈추고 올라갈 높이가 비로소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먼 길이라도 나아갈 수 있고 제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올라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입니다. 땅을 딛고 있다는 사실이 곧 희망입니다. 추락의 비행을 거슬러 단숨에 솟구쳐 오르려는 조급함만 버린다면, 어둠 속을 더듬거릴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발은 끝내 우리를 어둠 밖으로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
剝 不利有攸往
박 불리유유왕
-나아가면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서괘전>에 '賁者飾也 致飾然後 亨則盡矣 故受之以剝 비자식야 치식연후 형즉진의 고수지이박'이라고 했습니다. '비(산화비)는 꾸미는 것이다. 꾸밈을 이룬 뒤에 형통하게 되지만 형통함도 다하게 되기에 박(산지박)으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공자가 <계사전>에서 말한 '궁즉변窮則変, 극에 이르면 변화하게 된다'의 원리입니다. 좋은 시절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힘들고 괴로운 세월도 끝없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산지박괘는 땅 위에 산이 있는 상입니다. 언뜻 봐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요. 마치 땅 위에 하늘이 있는 상인 12괘 천지비괘를 처음 볼 때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천지비괘가 좋기 어려운 것은 올라가려는 하늘의 성질과 내려가려는 땅의 성질로 인해 소통의 의지, 변화의 기미가 막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산이 땅 위에 있으면 결국에는 깎여 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산지박괘의 착종괘인 15괘 지산겸괘의 <대상전>에서 '裒多益寡 稱物平施 부다익과 칭물평시'라는 표현을 본 바 있습니다. '많은 것에서 덜어 적은 것에 더해 주고, 사물을 저울질하여 평등하게 베푼다'는 뜻이지요. 그것이 천지의 도입니다. 산지박괘를 자세히 보면...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