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기행II

by 오종호

사람이 되기로 했다


간밤에 편의점에서 사온 먹거리들로 간단하게 아침상을 차린 후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포근한 날씨 덕을 충분히 봐야 했다. 오전에 보리암에 오르고 내려와 돋워진 입맛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은 후 다랭이 논이 있는 가천마을로 이동한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평일이라 매표소가 있는 복곡 제2주차장까지 이동이 가능했다. 주차료 5,000원과 입장료 1,000원을 지불하고 나서 천천히 흙길을 오른다. 목요일 오전이지만 사람들이 적지 않다. 주차장에 빼곡히 들어서 있던 관광버스가 기억났다. 오 분여를 걷자 목과 등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4월에 한번씩은 찾아오는, 여름의 어느 날을 빼닮은 햇볕이 매섭게 퍼붓는 맑은 날이었다. 재킷을 벗어 허리춤에 돌려 매고 반팔 티셔츠 하나 만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금산을 오른다.


이성계가 백일 기도를 한 후 조선을 건국하게 되자 산의 영험함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명을 금산(錦山)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보리암에 들어서니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장소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길이 보였다. 하늘을 새로 연 자의 기를 받고 싶어서 였을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누군가에겐 그곳이 사업번창이나 승진, 시험합격, 건강회복 등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는, 1등을 자주 배출하는 로또명당 같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곳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았다. 우주의 기운이 나만을 위해 특별한 행운을 선사하기를 기원한다는 것은 어쩐지 멋쩍은 일이었다.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과 함께 국내 4대 해수관음 성지로 꼽히는 곳이라 그런지 관광버스를 타고 온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모습이 경내 곳곳에 많이 보였다. 스피커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관세음보살’ 독경소리에 맞춰 잠시 손을 맞잡아 본다. 다들 소원성취하기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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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에서 나와 왼쪽 능선을 타고 2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전망이 탁 트인 망대가 있다. 남해안의 유려한 곡선과 그에 접하여 뿌리를 내린 사람들의 터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심호흡을 한다. 잠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눈을 감고 두 팔을 크게 벌려 나무처럼 하늘을 향한 채 금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 본다.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자연의 숨을 땅과 바다가 시작하는 곳에서 나의 몸 속에 불어넣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티끌 하나 없는 공간을 쇄도해 온 햇빛이 몸 구석구석에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듯했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내 옆의 나무와 풀, 바위와 바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리라. 나는 나무가 되어 사람들의 가슴에 안으로 안으로 뿌리내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풀이 되어 갖은 역경조차 꺼려하지 않고 남김없이 먹고 꼿꼿하게 자라 사람들을 부둥켜안기로 했다. 바위가 되어 모두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진중하게 중심을 잡고 버텨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바람이 되어 욕심 앞을 가볍게 벗어나 무욕의 공간으로 훨훨 떠날 줄 아는 자유를 잊지 않기로 했다.


등산화를 신고 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등산로를 따라 휘휘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내년 봄에는 금산의 비경들을 빠짐없이 눈에 담는 호사스러운 여행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내려오는 길에 한 무리의 노년 남성들이 웅성대며 둥글게 모여 있는 장면이 보인다. 누군가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고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곁눈으로 얼핏 봐도 어설프기 그지 없는 동작. 그렇다고 내가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또한 자신이 없었으므로. 한 때는 군인이었고 예비군에 민방위 훈련까지 성실히 수행한 이 땅의 남자가 결국 심폐소생술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갑작스럽게 더워진 날씨에 무리한 산행, 그리고 과음이 원인인 듯했다. 사람들의 몸에서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누군가 119에 연락을 취하여 헬기가 오는 중이라고 했다. 아무것에도 보탬이 될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나의 길을 갈 밖에 도리가 없었다. 부디 무사하셨기를. 그렇게 떠나기에는 그에게도 너무 아름다운 날임에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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