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호 Dec 09. 2020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라.

다시 사랑 받을 수 있을까요?

丁壬甲癸

未午子丑


乙丙丁戊己庚辛壬癸

卯辰巳午未申酉戌亥 (2, 1973)




未午

자월에 태어난 임수다. 십이운성으로 왕지요 양인이니 자기 주체성이 강하며 자수성가의 에너지다.


사회에 자신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며 타인들과 구분될 수 있는 자신만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해진다.


丁壬

未午子丑

월간에 갑목 식신이 있으니 자기만의 전문성, 능력, 실력을 갖춰 사회에서 기술, 재능, 언변, 강의, 집필 등의 활동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자신 뿐만 아니라 계수와 자수 겁재가 공통으로 함께 갑목 식신을 쓰는 것이다.


丁壬甲

未午子 

계수 겁재는 일간의 입장에서는 정관인 축토 편관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 또는 축토 편관의 권력, 권위, 명예, 조직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가자리에 있으니 국가나 해외의 특수 조직에서 근무하거나 국가적, 국제적 권위를 갖게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계수의 입장에서 축토 지장간에 신금 편인과 기토 편관이 있으니 계축은 특수기관에서 특수자격을 취득하여 갑목의 상관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편관과 편인의 에너지를 수용하여 쓰기에 종교, 명리, 철학성이 강한 간지이고, 백호로 편관을 깔고 있기에 자기 분야에서 권위 있는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기질을 갖고 있다.


丁壬

未午

자수 겁재는 갑목 상관을 드러내고 있으니 자신의 상관적 재능을 적극적으로 펼치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자축합하고 있으니 축토 조직에 속해서 일하거나 연간 계수의 권위에 동조하며 그 권위를 키워 주는 사람이다. 자축합하여 토의 에너지를 키우니 축토의 권위가 신장되는 것이고, 자수는 축토에 관대 받으니 축토가 커질수록 자수도 성장하고 대우 받는 입장이 된다.


자축합은 육합 작용으로 인력 작용이 강해 관계가 끈끈한 것이며, 해자축 방합으로 자수는 연간 계수와 인간적, 가족적, 의리적, 정情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갑목은 자수 정인에 근거를 두고 하는 행위니 갑자는 교육 분야에 어울리는 간지다.


甲癸

子丑

임수는 연월의 축토와 자수에서 드러났으니 축토 조직에서 계수, 자수와 함께 갑목 식신적 활동을 써서 일하는 사람이다.


임오일주로 임수가 사회에서 갑목 활동을 하는 이유는 오화 정재라는 대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화는 해자축 방합을 이룬 연월의 에너지에 제압되니 임수가 버는 오화 돈은 사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연월일 삼주가 위 명조와 동일한 사주 주인공의 경우 교육행정 분야의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사주의 직업성은 범주를 말하는 것으로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얼마든지 직업이 다를 수 있다. 이를 명리학의 모호성, 불분명성으로 공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대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가? 서로 달라 보이는 일을 하지만 그 일들이 결국 동일한 카테고리에 속한다는 것을 알 때 오히려 명리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의사, 간호사, 약사, 물리치료사, 방사선사 등은 서로 다른 직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이라는 동일한 직업적 범주를 갖고 있는 것이다.


未午子丑

태어난 시는 추정하였다.


임수는 시간에 정화 정재를 갖고 있으니 사회에서 갑목 식신적 활동을 통해 재물적 결과물을 개인적으로 추구하고 획득하는 성향이다.


갑목을 말과 글이라는 속성으로 압축하면, 사회의 자수 대중을 대상으로 강의와 강연을 하고 글을 써서 책을 내는 행위와 같다. 오행적으로 갑목의 특성을 지니니 대중은 임수의 말과 글을 마치 세상에 없던, 처음 만나는 듯한, 신선하고 활력 넘치는 것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된다.


丁壬甲癸

未午子丑


乙丙丁戊己庚壬癸

卯辰巳午未申酉戌

술대운, 연지가 축술형하니 해외의 물상이 된다. 연지가 동하는 해에 모든 사람이 해외로 공부하러 떠나거나 이민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나 그런 작용력이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을 것이냐는 각자의 선택이다. 곧 사주 에너지의 활용은 개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사주를 가졌다고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사주라도 대통령부터 마을 이장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신유대운, 강한 정인 대운을 만나 공부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는 시기다. 술대운 시절 축술형으로 지장간의 신금이 천간에 드러나는 세운을 만나면 미리 공부의 기운으로 쓰게 된다. 인성 세운을 만나지 못해도 임술대운 자체가 임수가 관대지 편관을 만난 대운으로 자기 통제력을 가져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는 에너지로 쓸 수 있게 된다.


신유는 특히 신금과 유금의 오행적 특징으로 인해 정신적, 사상적 공부에 심취하게 만드는 기운이 강하다. 완벽함, 완전함, 고독함, 깨달음을 상징하는 두 글자가 하나의 간지를 이뤘기에 원국에 신유가 있거나 대운에서 신유를 만나면 해당 시기에 단체에서 홀로 떨어져 지내거나 종교, 명리, 철학 공부에 빠지게 된다. 스님들의 출가도 이 기운을 만날 때 많이 이루어진다.


유명인들이라면 신유, 경신과 같은 인성 대운에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丁壬甲癸

午子

연주 계축이 금전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자신의 권위로 사회의 대중들과 자축합으로 교감하며 대가 없는 말과 글을 갑목으로 표현한다면, 임수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시지에 미토 정관을 갖고 있으니 자기 만의 조직을 세우는 것인데 연지 축토와 충하니 자기 보다 앞서서 자신과 유사한 일을 했던 사람들이 쌓았던 권위와는 다른 유형의 것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축토는 사유축 삼합과 해자축 방합의 마감지이자 조절지이니 인성과 비겁 곧 학문과 사람을 추구하는 관성이라면, 미토는 해묘미 삼합과 사오미 방합의 묘고지로 식상생재 곧 재물을 추구하는 관성이다.


임수의 이 미토 조직은 사회의 자수 대중들과 자미 원진 관계이니 운에서 발현되면 대중의 원망과 미움을 살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암시한다.


壬甲癸

未午子丑    

일시 오미합으로 재관이 강한 것이며 미토 양인과 오화 건록지를 근으로 깔고 있어 시간 정화는 정재이지만 많은 돈이다. 오미합으로 미토 사오미 방합의 묘고지가 꽉 차 밖으로 드러난 재물과 같으며, 돈이 많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과 같다.


丁壬甲癸

未午子丑


乙丙丁戊庚辛壬癸

卯辰巳午申酉戌亥 

기미대운, 간여지동 양인 정관 간지로 구성된 대운을 만나 천간에서 재생관하고 식신정관합 하여 큰 명예와 권위를 획득하는 운이다. 연간 계수 겁재의 입장에서는 편관을 만나는 것이지만 갑목 상관으로 상관합살하는 운이니 계수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


다만 지지의 경우는 좀 다른데 미대운 시절(47세 이후)이 되면 축미충으로 기존 사람들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 오미합으로 재물을 많이 벌고 명예가 높아지지만 자미 원진의 문제가 생길 것을 암시한다.


경자년, 대중의 편인적 지지를 기대하는 운이지만 대중의 편인적 생각 경금이 갑목을 충하니 대중이 임수의 활동을 멈추게 하는 것과 같다.


지지에서는 자수가 오화를 충하고 미토와 원진 관계를 이루니 대중이 임수의 돈을 문제 삼고 미토 권위와 조직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쏟아내게 된다.


최근 풀소유 논란으로 사회의 이슈가 되었던 혜민 스님의 사주다. 위에서 말한 대로 생시는 추정한 것이니 그를 토대로 전개한 내용에 대해서는 감안하고 읽어 주시기 바란다.




한 사람 안에 담긴 마음을 타인이 오롯이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명리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과 학문적 도구 이전에 권리의 문제입니다. 아무도 타인을 향해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적 범죄자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명리학은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기 위한 만능 잣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재성을 깊게 사유하고 운명과 인생 사이에서 보람과 행복을 건져 올리는 철학입니다. 위의 글은 혜민 스님이라는 한 사람을 해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주 속에 운명적으로 담긴 에너지와 그 에너지가 빚어 내는 삶의 범주적 모습을 탐구하기 위한 것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수행을 했어도, 그 수행을 통해 남다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운명적 기운은 보이지 않게 일생 동안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그 기운의 실체를 이해할 때 비로소 쓰지 말아야 할 에너지와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에너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고, 기운에 휘둘리지 않는 고요한 자신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 이해의 과정에서 과거에 저지른 잘못, 타인에게 준 상처 등에 대해 솔직한 반성과 성찰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으로부터 지지와 추앙을 받게 된 유명인들은 반드시 새겨야 합니다. 대중은 사랑할 권리가 있는 만큼 미워할 권리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을 사랑해 준 대중이 날리는 비난의 화살 앞에서 그 권리를 떠올릴 때 비로소 서운함도 아쉬움도 바람에 실려 떠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고 그들로 하여금 걸음이 멈춘 곳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보게 해주었으니 혜민 스님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준 것은 작지 않습니다. 수행자가 꼭 절에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절에 있으면서도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한 욕망을 품고 동일한 삶의 양식을 따르는 것보다 오히려 속세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대중의 일상을 위로하고 일상적 수행을 통해 삶의 평온과 행복을 찾도록 돕는 일이 더 가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수행자다울 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속적 이재 능력을 발휘하면서 명예를 누리고 존경까지 받고자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소유와 소유가 주는 혜택을 누리고자 한다면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삼보三寶 인연으로 부처님께 귀의한 자의 소박하고 담백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대중에 의해 그의 걸음이 멈춰졌고 걸음이 멈춰지기 전에 멈춰진 후의 일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 또한 삶입니다. 누구나 추락의 끝에서 바닥을 만나기 마련이고 그 바닥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자기의 길을 보게 되고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명도 인생도 온전히 자기 만의 것입니다.


남아 있는 대운으로 짐작하건대 혜민 스님은 산속에서 홀로 수행하는 삶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대중과 호흡하는 삶이 맞습니다. 대신 자기도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자비로워져 다시 사람들 앞에 서길 기대합니다. 사회 속 수행자로서 많은 돈과 명예를 얻어 곧장 어둡고 추운 곳에 되돌려 주는 방식을 따른다면 심산유곡에서 홀로 수행, 정진하는 것보다 더 큰 보람을 사람과 세상, 그리고 시대에 남기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들려 주었던 얘기 한 대목을 그에게 건네 주고 싶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친밀도를 측정할  있는 방법은 내가  사람 앞에서 얼마나 어린아이처럼   있는가?


사랑하면 누구나 어린아이가 됩니다. 


티 없이 맑은 어린아이가 되어 돌아온다면 대중은 다시 알아챌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진면목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견성見性하여 돌아올 어린아이를 기대합니다. 대중에 대한 큰 사랑 한아름 품고 돌아오소서.




https://www.youtube.com/@luckhumanwork


매거진의 이전글 꼼수 쓰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