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추억IV

by 오종호

강해지려면 키를 낮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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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 산장(Kibo Hut, 해발 4703m)을 향해 나아가는 길. 까마귀들만이 음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고지 적응을 위해 호롬보 산장에서 만 하루를 더 묵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는 것은 아니었다. 4000m 고지의 얼룩말 바위(Zebra Rock)까지 왕복 3시간 여를 걸으며 고지 적응 훈련을 하였다. 남은 시간 동안 고산증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들을 하산시킬 것인지의 논의로 분주해졌다. 일단 키보 산장(Kibo Hut)까지 올라가는 쪽으로 의견이 정리되었다. 증세가 개선되지 않을 경우 키보 산장에서 휴식을 취하며 일행을 기다렸다가 함께 하산하는 것이 팀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다.


키보 산장까지 이어진 길의 양 옆은 메마른 사막 풍경으로 채워져 있었다. 오랜 세월 차가운 바람을 맞아 둥글게 깎여 나간 돌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선 흡사 죽음의 땅 위에서 생명체의 존재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눈이 가 닿는 곳 여기저기서 먼지가 쌓여 흙색으로 푸석푸석 해진 피부를 모진 바람에 털어내는 낮은 키의 풀들이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풀이었다, 풀. 킬리만자로를 지키고 있는 마지막 생명은. 척박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강함을 소리 없이 증명해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이름 없는 풀들 뿐이었다.


일신을 땅 가까이 끌어내려 거센 바람을 피하고 사지四肢끼리 부둥켜안아 체온을 유지할 줄 아는 킬리만자로의 풀들의 키는 이 땅의 그것들처럼 낮았다. 이방인의 걸음에 채이는 공기조차 아까울 질식의 사지死地에서 악착스런 삶을 이어갈 줄 아는 풀의 지혜는 키를 낮추는 데 있었다. 생각해보면 풀은 어디서나 그럴 줄 알았다. 한없이 높아만지려는 인간의 눈에 다만 비켜서 있었을 뿐, 풀은 강해지는 비결을 언제나 선명한 빛깔로 손 흔들어 일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사지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흡연의 욕구를 달래기 위해 마지막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 나서 오랫동안 손으로 눈으로 풀을 어루만졌다.


나는 다시금 낮아질 것을 다짐했다. 올라가 더 높은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탐욕에서 애초에 벗어나 있는 나의 천성이 고맙다. 지친 보행자들의 머리 위로 까마귀들이 높이 날았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녀석들의 눈에 우리의 높은 키는 분명 위태롭게 보였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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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 험하고 바위가 무너져 내려 더 이상 등반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마웬지 피크(5149m)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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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레폴레, 휴식, 그리고 충분한 물의 섭취는 고산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힘든 등정이었지만 나는 내내 킬리만자로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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