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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Dec 12. 2021

일상의 논어 <학이學而7>-위지학謂之學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왈 현현이색 사부모 능갈기력 사군 능치기신 여붕우교 언이유신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


-자하가 말했다. "현자를 존경하기를 색을 밝히듯 하고, 부모를 섬길 때는 온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길 때는 온몸을 바치고, 벗들과 사귈 때는 말에 신의를 지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하겠다." 



자하도 공자보다 마흔네 살 어렸습니다. 공자의 학문과 사상이 시대를 초월하여 전승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젊은 제자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때묻지 않은 신념이 큰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스승 공자의 학식과 인품에 대한 청년 제자들의 신뢰가 그만큼 공고했고, 뛰어난 청년들의 뜨거운 질문에 큰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공자의 그릇이 깊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현현賢賢'에서 앞의 현은 동사, 뒤의 현은 명사입니다. 그래서 '현자를 존경하다, 현자를 따르다'와 같이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색易色'은 색을 좋아하는 것이니 곧 색을 밝히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의 이성에 대한 감정, 육체적 쾌락에 대한 갈구'를 연상하면 쉽습니다. 하루종일 데이트하고도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이미 그리워지는 연정처럼 어질고 현명한 스승 같은 존재를 갈망하는 마음을 '현현이색'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색을 '역색'으로 읽어 '낯빛을 바꾸다'나 '색을 밝히는 것과 바꾸다'와 같이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색합니다.


나머지 구절은 앞의 6장(학문學文)의 내용과 궤를 같이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이미 인仁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학력 따위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학문의 목적이란 지식을 쌓는 데 있지 않고 지혜를 얻고 각성하여 실천하는 데 있다는 판단이며, 실천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면 지식은 축적했으나 말로만 떠들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 자보다 낫다는 인식입니다. 


지식인이란 학력이 아니라 앎의 실천 여부로 판별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배워서 알고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현 시국에서 배운 사람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간단한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20대 대통령으로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가?", 이 질문에 '윤'이라고 대답하면서 '무조건 정권은 교체해야 한다'거나 '불공정과 몰상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등의 뻔한 말을 늘어놓는다면 당신은 배운 자도 아니고 아는 자도 아닙니다. 만일 저의 이 말에 화가 난다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이지 내 것은 아닙니다. 자하는 아마도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비록 배웠다고 말한다 해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당신의 무지Muji로 인해 나라가 다시 위기에 처할 일말의 가능성이 생겨난 사실이 한심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당신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신의 무식한 바람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체로서의 국민이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하는 선택을 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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