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V

by 오종호

- 이데리움에 온 걸 환영하네.


회장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책상 위 모니터 안에서 회장의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회한 정치인의 모습을 닮은 세계적인 기업가는 영진이 의자에 앉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커피 잔을 들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천천히 한 모금을 삼켰다.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한 치밀한 연출일 것이었다. ‘모든 영상은 설정의 산물’이라고 말했던 대학 시절 교양과목을 맡았던 이름 모를 시간강사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나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가업을 이은 뒤 50년의 세월을 이 회사에 바쳤네. 그러나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나의 꿈은 아직 갈 길이 멀지. 자네가 알다시피 내 나이 이제 팔십이니 내가 얼마나 더 경영 일선에서 지휘를 맡을 수 있을지는 신 외에는 알 수가 없다네. 지금 우리 회사는 안팎으로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네. 마치 수많은 기업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우리 한 회사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야. 나는 동물적인 직감으로 깨달았다네. 앞으로의 5년이 우리 회사의 생사를 결정할 것임을 말이야. 지금 세상에는 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회사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시장을 싹쓸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네. 젊은 천재들의 속도를 따라가기에 나는 너무 늙었지.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네. 내가 건설한 이 제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천재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인재들에게 권한을 줘야 한다는 것을.


아비 된 자로서 자식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계열사들을 나눠 맡고 있는 자식들은 능력의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었지. 어쩌면 그것은 처절한 경쟁 없이 경영수업만으로 부와 신분을 세습하도록 만든 나의 과오인지도 모르지. 자네도 익히 알고 있다시피 지금 내 자식들은 다만 나의 사후에 이 그룹사의 주인으로 낙점 받기 위한 암투에만 열중하고 있다네. 계열사의 임원들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주인의 권력 승계를 위해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데만 전전긍긍하고 있어. 그룹사 임원회의를 하다 보면 서로 자신들의 성과를 부풀리고 타 계열사의 성과를 까 내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네. 나는 결심했어. 이 제국의 무궁한 미래를 위하여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네.


자네는 이 제국의 미래를 위해 선택된 인재일세. 앞으로 2년간 자네는 계열사 중 하나를 이어받을 준비를 하게 될 것이네. 지금까지 자네가 보여준 경이로운 성과와 제국에 대한 헌신을 감안하여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하는 회사를 선정했네. 자네의 모든 잠재 능력을 끌어내어 회사의 미래를 설계해 주게. 회사에 대한 모든 정보는 자네의 컴퓨터에 들어 있네. 날마다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 되어 제공될 걸세. 아울러 자네는 나의 뒤를 이어 이 그룹사의 주인이 될 후보자 중의 하나가 되었네. 그룹사의 모든 정보도 숨김없이 자네에게 제공되었고 날마다 새로운 정보가 제공될 것이네. 자네는 앞으로 2년간 이곳에서 자네의 운명을 바꾸게 될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네. 동시에 그것은 나와 제국의 기회이기도 하지. 자네의 능력을 믿네. 2년 후 자네의 것이 될 회사의 20년을 기획해 주게. 그리고 제국의 200년을 생각해 주게. 자네의 건투를 비네. 이만.


아 참, 이런 깜빡할 뻔했군. 혹시라도 2년의 시간을 더욱 충실히 사용하고 싶을 것을 대비해 이 안에서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편의를 완벽히 구비해 두었다네. 마음껏 활용하기 바라네. 참고로 이곳의 이름이 이데리움인 이유는 플라톤의 생각이 옳았다는 깨달음 덕분이네. 결국 이 세상은 소수의 자격자들이 이끌어가는 것이야. 나의 시대는 나 같은 사람이,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는 자네 같은 인물이. 그는 분명 나와 자네 같은 사람을 철인으로 상상했을 것이야. 수고하게.”


회장의 연설은 비장했다. 그가 반복 사용한 제국이라는 단어와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끌어온 철인이라는 낡은 용어, 그리고 이데리움이라는 거창한 신조어는 모두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늙은 기업가의 결의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강민 회장, 그는 자본주의의 화신이었다. 경영학계에서는 그를 ‘경영의 유일신’이라고 추앙하고 있었다. 경영을 종교의 반열로 끌어올린 자이자 스스로 신이 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세상에 존재하고 난 이후부터 그 동안 경영의 대가로 불렸던 모든 사람들은 다만 그의 아류로 물러났고, 그들의 이름은 그가 창조한 교리를 전도하는 대리인으로만 의미가 남아 있었다. 영진은 담담했다. 그의 선택을 받고 그의 제안을 수락한 후 앞으로 벌어질 어떤 일이든 예측 따윈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진은 회장의 영상이 사라진 터치스크린 모니터 바탕화면의 아이콘들에 시선을 주었다. 식사, 간식, 회사 자료, 그룹 자료, 음악, 영화, 운동, 수면 따위의 이름을 가진 아이콘들이 행과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 영진의 눈을 고정시킨 것은 ‘미미’라는 이름이 붙여진 여자 얼굴의 아이콘이었다. 본능적인 호기심으로 아이콘을 누르자 프로그램이 가동되었다. 여자의 미모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선명한 사진이 나타났고 사진 아래에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름: 미미, 나이: 25세, 키: 164cm, 체중: 47kg, 특징: 긴 생머리의 청순가련형, 패션 디자인 전공, 영어/일어/중국어/독일어/프랑스어 능통.’


미미의 사진을 부드럽게 터치하자 다시 10개의 서로 다른 의상 스타일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자 ‘1분 후 뵙겠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낮처럼 환했던 하얀색 조명들이 꺼지고 빨강과 파랑 색조의 은은한 무드 등들이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책상이 놓인 자리에서 가장 먼 맞은편의 좌측 벽면에 천장부터 바닥까지 직사각형 형태로 금이 가는 듯 하더니 갈라진 벽이 앞으로 1m쯤 그대로 전진하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벽 밖으로 드러난 옆면의 문이 열리면서 실내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열린 문으로 조금 전 모니터에서 보았던 미미가 나와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영진을 향해 다가왔다. 무릎 바로 위에서 멈춘 타이트한 회색 스커트 위에 속이 비치는 흰 블라우스 차림의 오피스룩을 하고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