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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잉고잉 박리라 Oct 11. 2022

(D+1) 집중치료실에 누워 있는  엄마를 만났다

간밤에 피곤했던 모양인지 눈을 뜨니 시계는 벌써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아침 9시 30분에 맞추어 병원에 도착해 집중치료실로 가 간호사에게 주치의 면담을 요청했다. 한참 뒤 간호사는 전화로 주치의에게 전달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아마 수술 중인 것 같다고 좀 기다려달라고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간호사 분이 지금 집중치료실 앞으로 오면 된다고 전화가 왔다.


주치의를 만나자마자 엄마의 CT촬영 결과를 물어보니 다행히도 간밤에 재출혈은 없었다고 했다. 일단 첫 번째 고비는 잘 넘기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치의는 수술부위(클립으로 찍은 동맥)도 괜찮아 보인다고 했다. 다만 엄마가 수술한 부위가 눈 위 왼쪽 전두엽 쪽인데 그 부위에 부종이 보인다며 향후 합병증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했다. 일단 지금은 합병증을 걱정할 시기는 아니니 그런 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며 엄마의 호흡은 많이 돌아왔지만 폐부종 때문에 아직 인공호흡기를 빼도 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병원에 온 김에 엄마의 면회를 부탁드리니 그렇게 해주겠다고 해서 손을 씻고 가운을 입었다. 주치의가 간호사에게 면회를 시켜주라고 하고 내려가니 간호사가 다가와 한 사람씩만 교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아빠가 제일 먼저 들어갔는데 금세 나왔다. 면회를 하고 나오는 아빠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바로 다음으로 내가 들어갔는데 내가 보기엔 엄마의 상태는 그래도 어제보단 좋아 보였다. 그 이유는 몸의 부기가 어제보단 조금 더 빠져서였다. 여전히 피 딱지와 급히 자른 머리카락의 흔적이 보였지만 그걸 좀 닦아 내고선 엄마를 바라보니 나 역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빠가 왜 그런 표정으로 빨리 나왔는지 한순간에 이해가 되었다.  


엄마가 들을 수도 있으니 엄마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빠도 빨리 나왔는데 나는 좀 엄마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울음을 삼키고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엄마에게 수술이 잘되었고 오늘 아침에 찍은 CT 결과도 무척 좋다고 의사에게 들은 결과를 과장해서 설명했다. 어제 병원에 빠르게 도착한 것도  엄마가 쓰러진 시간이 아침이었던 것도 그리고 병원에 도착해 바로 수술을 한 것도 모두 다 운이 좋아서였다고, 여러모로 엄마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도 이야기해주었다. 집에 갔더니 가스불이 켜져 있었지만 불도 나지 않았고 냄비 하나 탄 것 말고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고도 이야기해주었다. 원래는 면회가 되지 않는데 주치의를 잘 만나서 그의 배려로 지금 여기에 엄마와 잠깐이지만 함께 있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엄마도 우리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 주치의가 주말에 한 번씩만 면회를 시켜주겠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엄마를 보러 오기는 어렵겠지만 다음 주 주말이 되면 다시 엄마를 만나러 올 수 있을 거라고도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 사랑해! 사랑해! 조금만 더 힘내서 이제 회복 잘해보자"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내가 이야기하는 와중에 손가락도 움직이고 다리도 조금 움직이고 눈도 가늘게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머리를 들어 앉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엄마의 모든 동작이 무엇하나 아직은 엄마 마음만큼 움직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잘 들렸던 모양인지 반응들이 있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이불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은 엄마를 보니 통증이 많이 심한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참을 엄마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발도 주물러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나왔는데, 남편은 아빠처럼 금세 나왔다. 사정을 물어보니 남편은 사위라 그랬는지 간호사 선생님이 원래 면회가 되지 않는 건데 이렇게 길게 있으시면 안 된다며 잠깐 뵈었으면 얼른 마무리하고 나가시는 게 좋겠다고 했다고 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꼭 참고 엄마에게 이런저런 다정한 말을 건네는 딸에겐 도무지 그런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쉬다간 아빠가 늘 가던 산책을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고 아빠도 걱정되었다. 아빠는 평소 두류공원을 산책하거나 금봉산(집 앞 아주 낮은 뒷동산)을 오르곤 했는데, 내가 따라나선다고 하니 아빠는 그럼 금봉산을 오르자고 했다. 평소 달리기로 잘 다져진 나는 아빠와 함께 금봉산을 올랐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빠는 이렇게 등산을 하고 있으며 아무런 잡생각이 들지 않아 좋다고 했다.


시부모님께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계실 테니 오늘은 이만 우리 집으로 올라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님 아버님께서 아이들은 우리가 잘 데리고 있을 테니 면회가 안되더라도 최대한 친정집에 머물며 아빠라도 챙겨드리고 오라고 이야기해주셔서 고민 끝에 월요일까진 아빠와 함께 있다가 올라오기로 했다.


집에 있으니 엄마의 전화가 자꾸 울린다. 저장된 이름을 보니 엄마의 형제자매이거나 조카들, 친구들이었다. 아빠에게 엄마의 전화를 받아서 사정을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닌지 물었는데 아빠는 굳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계속 전화가 오는데 마냥 받지 않기도 뭐해서 아빠에게 그래도 친척들 전화는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엄마의 조카인 사촌언니의 전화를 내가 받겠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아주 아가였던 시절 큰오빠의 아들딸들, 그러니까 나에겐 사촌언니와 오빠들을 우리 집에 데리고 있었다. 엄마의 큰 오빠네는 시골이었고 과수원을 하고 있었기에 도시 생활을 하던 엄마가 조카들이 좀 더 좋은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과거 때문이었는지 엄마는 꽤나 조카들과 가까운 사이였다.


엄마의 폰에 울리는 사촌언니의 전화를 내가 받으니, 자꾸 고모 생각이 어제부터 나서 전화했는데 언제 내려왔냐며 너네 엄마한테 별일 없냐고 내게 물었다. 어제 아침의 사정을 설명하니 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조금 뒤 차례로 엄마가 데리고 있었던 조카들, 그러니까 나의 사촌오빠와 언니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모두들 많이 놀랐고 엄마가 많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내가 한번 물꼬를 트자 이번엔 이모들이 연이어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아빠는 천연덕스럽게 엄마의 갑작스러운 병원행을 말하지 않고 넘기려 했지만 결국 집요한 이모들의 질문 세례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모들이 그래도 친자매한테는 얘기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고 나서야 아빠는 엄마의 상황에 대해 실토했다.

 

 엄마는 집에만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없는 친정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고 또 하루를 보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가 없는 엄마 집이 참 낯설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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