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변곡점을 지나다
입사 후 두 번째 휴직. 한 번 해본 덕분인지 이번에는 제법 능숙하게 휴직 신청서를 올린다. 휴직 시작 날과 복직 날을 차례로 입력하고 나니 자동으로 휴직 기간이 계산된다. 팀장님과 팀원들에게 휴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휴직 신청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다.
예상 복직 일 옆에 적힌 ‘2021’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어린 시절에는 2020년이 되면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달나라로 여행을 가게 될 줄 알았다. 빨리 시간이 흘러 2020년이 되길 바랬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2020년이 되었지만 자동차는 아직도 길 위를 돌아다니고 달나라는 여전히 훈련을 받은 소수의 사람만이 갈 수 있다.
수 십 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지만 모든 것이 변하지는 않았다. 1년이라는 휴직기간 동안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전혀 모르겠다. 2020년에 바라보는 2021년은 막연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두려움과 설렘, 아쉬움과 후련함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는 마음과 함께 휴직 신청 버튼을 클릭했다.
휴직은 어딘지 모르게 퇴직과 닮아있다.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인수인계를 마무리하고 사무실에 있는 개인 짐을 정리했다. 깨끗해진 자리를 보니 내가 이 공간을 떠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막 새로 도착한 것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갑자기 매일 보던 사무실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 빈자리는 곧 다른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겠지- 잠깐 멈춘 것은 나 하나일 뿐, 회사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잘 지내세요.”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나의 휴직은 결국 업무 공백이며 누군가의 업무 과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휴직은 휴가가 아니지만 몇몇 동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사실 육아휴직은 육아직이라 부르는 게 더 나을 정도로 출근만큼 아니 그 이상의 에너지와 스트레스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당장 내일부터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휴가를 떠날 때처럼 홀가 로운 기분이 든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가로 미소가 새어 나오려고 하는 걸 꾹꾹 누르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왔지만 어딘지 마음 한편이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짐처럼 무겁다.
돌아올 수 있을까?
문득 돌아본 사무실은 멀게만 느껴졌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문득 친한 동료에게서 들은 질문이 떠올랐다.
“휴직 동안 뭐 할 거예요?”
“1년 금방 지날 텐데 뭘 할 수나 있을까요?”
얼버무리며 대답했지만 사실 궁금했다.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뭔가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만약 1년 동안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동료의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 없었고 내가 나에게 던진 질문에도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휴직은 계획된 일정이었지만 휴직 동안 어떻게 지낼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돌아보니 인생의 작은 이벤트들은 촘촘히 계획을 세웠지만 정작 큰 이벤트들은 그냥 흘려서 보내왔던 것 같다. 오늘은 몇 시에 출근하고 몇 시에 퇴근할지, 점심은 어디서 누구와 먹을 지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시간 순서대로 상세히 입력되어 있었다. 반면에 5년 뒤 인생 계획은 무엇인지,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지,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어디가 끝인 지 알 수 없는 어둡고 긴 터널 안을 걷는 기분이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볼 수 없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쯤 인지도 알 수가 없다. 나는 같은 길을 돌고 도는 중인 걸까 아니면 비슷한 듯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는 중인 걸까.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멈추면 안 될 것 같아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터널 안이 어두워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을 뜨고 현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 여태껏 눈을 감은 채 걷고 있었다는 것을. 세상이 어두워서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나를 위로했다. 조금만 더 준비되었을 때, 조금만 더 괜찮아졌을 때 눈을 뜨자고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조금만, 조금만을 외치며 나는 수십 년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눈을 감은 채 습관처럼 걷고 있었다. 왜 걷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인생의 변곡점은 언제나 예기치 않게 우리를 찾아온다. 1년의 휴직. 무엇을 해도 좋고 무엇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하얀 도화지 같은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1년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생각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답을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답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답을 찾고 싶어졌다. 이유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걸어가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용기를 내어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터널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컴컴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니 터널 안의 형태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낯익은 듯 낯선 공간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여태껏 하나의 길을 계속 걸어온 줄로만 알았는데 내 뒤에는 여러 갈래의 길들이 이리저리 엉켜져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눈을 감고 그저 걸을 때는 몰랐다.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당연하면서도 단순한 사실을. 눈을 뜨고 바라보니 내 앞에는 수많은 길이 놓여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어디로 가야 가장 쉽고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를 계산해 보려고 했다. 내비게이션 어플이 목적지만 입력하면 단 몇 초만에 최적화된 길을 안내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내 인생에 대한 내비게이션 어플도, 목적지도, 지도도 없었다. 이 상태로는 쉽고 빠른 길을 커녕 당장 나아갈 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 순간 나는 모험을 시작해보기로 결심했다. 최적의 길은 아니더라도 내가 가보고 싶은 길을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길을 가던지 눈을 감고 걸을 때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 게다가 나는 튼튼한 두 다리와 1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꾸준히 나아갈 체력을 갖고 있다. 가보고 싶었던 길이 어쩌면 나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스스로 길을 선택하고 걸어 나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은 그렇게 계획 없이 우연히 시작되었다.
Sometimes,
things don't go as planned.
It's called life.
때때로 일이 계획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