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도 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

결국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by 유메이


할머니 : 언제 걸을래?
엄마 : 걷고 싶을 때 걷겠지-
아이 : ㄷㅇㅇㅇㅁㅂㅇ



엄마의 생각

돌이 다 되어가는 둘째는 좀처럼 걸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별로 걷고 싶어 하지 않는다. 첫째 어릴 적과 똑 닮은 둘째는 뒤집기도, 배밀이도, 앉기도 첫째보다 조금씩 느렸다. 그렇지만 결국 다 해냈다. 걷기 역시 자기만의 속도로 해 나가게 될 것임을 알았기에 걱정되거나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의 엄마이자 둘째의 할머니의 친구의 딸의 친구의 옆집에 사는 이름 모를 어떤 아이는 9개월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두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나에게는 크게 관심 없는 작가의 소설 속 한 구절처럼 느껴진다. 소설의 장르가 무엇인지, 주인공은 누구인지, 소설 속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소설 속 그 아이가 100일부터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관심이 없을 것이다.


쌀통을 보니 쌀이 다 떨어졌다. 이것저것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다 보니 10만 원이 훌쩍 넘었다. 돌이 지나면 나라에서 20만 원씩 주던 양육수당이 15만 원으로 줄어든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분유 값이 줄어든 만큼 반찬 값이 늘어나기 때문에 장보기 비용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늘어난다. 관련 제도를 기획한 사람들이 결혼을 안 했거나 아이가 없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아이들이 이미 다 컸거나.


시간이 너무 늦어지면 다음 날 새벽에 물건을 받을 수 없어 후다닥 주문 버튼을 누른다. 주문 완료. 내일 새벽이면 친절한 기사님께서 쌀과 기저귀, 떡뻥, 유아용 세제를 문 앞까지 배달해 줄 것이다. 줄어든 5만 원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밝게 해 주는 데 유용하게 쓰이길 기대해본다.


엄마의 엄마의 생각

나의 엄마 그러니까 아이의 엄마의 엄마는 생각이 전혀 달랐다. 나와는 달리 차분하고 요리도 잘하고 인품 또한 훌륭한 우리 엄마.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은 엄마의 딸로 태어난 것이다. 평생 동안 나에게 최고의 엄마였고 지금도 최고의 엄마이며 아이들에게도 매일 최고 소리를 듣는 세상에 둘도 없는 할머니다.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생각도 젊은 편이지만 걱정 앞에서는 언제나 딱 그 나이, 50년대생 할머니였다.


입으로 푸르르하는 아이를 보며 비가 오려나보다, 목욕을 좋아해서 술을 잘 먹으려나보다 웃던 할머니의 눈에는 돌이 다 되어가도록 걸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아이가 내심 걱정되었나 보다. 어떤 날은 매회 본방사수 중인 엄마의 최애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를 스포일링 하며 그래도 여태껏 돌이 지나도 걷지 않는 금쪽이는 나온 적이 없다고 전해주었다. 요즘은 즐겨보는 요리 유튜브에 육아 유튜브까지 챙겨 보는 중이다. 때 되면 다 걷는다고, 원래 남자아이들은 여자 아이들보다 걷는 게 느린 편이라는 말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나 보다. 어쩌면 신생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있었던 엉덩이 윗부분의 함몰 (딤플이라고 한다)이 걷는 데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한 마디가 엄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걱정 어린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문득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와 동생에게 사랑을 너무 많이 주어서 더 이상 남은 사랑이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엄마를 보니, 둘째를 낳아보니 알게 되었다. 사랑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난 만큼 사랑은 점점 더 커져나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의 생각

엄마랑 할머니는 참 재미있다. 내가 너무 어려서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가끔 내 앞에서 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때가 많은데 그건 정말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 알고 있다. 다만 아직 표현하는 법을 모를 뿐. 빨리 누나만큼 커서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 앞에서 내 이야기하지 마세요”라고 말이다.


요즘 엄마와 할머니는 내가 왜 걷지 않느냐에 관심이 많다. 사실 엄마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내 걸음마에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은 바로 할머니다. 엄마가 외출을 나가서 나랑 단 둘이 있는 날이면 할머니는 나에게 온화한 미소로 물으신다.


“우리 똥강아지 언제 걸을 거니?”

“ㄷㅇㅇㅇㅁㅂㅇ” (걷고 싶을 때 걸을게요 할머니! 지금은 별로 걷고 싶지 않아요.)


나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나를 보고 웃고 계신다. 아마도 내 말을 잘 듣고 이해하신 듯하다. 오늘도 기어 다니며 바닥에 있는 장난감들이랑 신나게 놀아봐야지!




결국 둘째는 집에서 소소하게 돌을 축하해 준 날에도 걷지 않았다. 식구들이 누나는 이 맘 때 걸어 다녔다고 말해줬지만 아량곳 하지 않았다. 어찌나 빨리 기던지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첫째의 뒤를 기어서 바싹 쫓아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 할아버지는 저 정도 체력이면 곧 걷겠다고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놀랍게도 그렇게 말한 지 1주일도 안 된 어느 날, 갑자기 책장 모서리를 잡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기 키보다 조금 높은 데 있는 누나의 장난감이 만져보고 싶었나 보다. 까치발을 했다가, 선반을 잡고 좌우로 움직이다가 결국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자 엉엉 울어버렸지만, 스스로 집고 일어나 세네 발자국 옆으로 걸었다.


여태까지 걷지 못해서 기어 다닌 줄로만 알았는데 힘차게 집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은 별로 걷고 싶지 않았나 보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하려고 했는데 옆에서 자꾸 하라고 하면 괜스레 하기 싫어져 더 안 했던 것 같다. 할 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지금이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때가 아니라서, 그리고 지금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안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마음이 먼저 하고 싶다고 말을 건네 온다. 그때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 일을 했다. 시험공부도 그랬고, 취업도 그랬다. 하물며 걸음마라고 크게 다를까 싶다. 걸음마든 뭐든 다 자기가 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인생에도 육아에도 정답은 없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몇 가지 육아템이 있지만 이것 또한 케이스 by 케이스 (일명 애 by 애)이기 때문에 내 아이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의 대답을 듣거나 속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이럴 것이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라며 어른의 입장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상황을 유추해 해석할 뿐이다. 육아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쉽게 찾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오늘도 수많은 엄마들이 내 아이만의 정답을 찾아 헤맨다. 아마도 정답 찾기에 익숙해진 우리 안의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새 계속 등을 떠밀기 때문이지 않을까-


자신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답을 찾고 만나게 될 있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과 엄마들, 그리고 나 자신을 응원한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영화, 인터스텔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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