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nry Dec 16. 2023

그날, 봉평에는 폭설이 내렸다.


그땐 참 신기했다. 

할머니가 밤새 잠을 설친 다음 날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높아진 기압과 습도는 

할머니의 관절을 누르고

시린 고통은 할머니를 쉬 잠들지 못하게 했다. 


참 신기하다.

내가 잠을 설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눈이 서걱거리는 소리 때문일까

어제도 잠을 못 이뤘는데

아침에 깨어 보니 눈이 내렸다. 


그런 날이면 아득한 옛날이 생각난다. 

급히 강원도 봉평으로 갈 일이 생겼다. 

동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이른 오후 버스를 타고 

한참이나 먼 길을 달려 장평으로 가서

다시 시골 버스를 타고 봉평에 도착하니 

겨울 해는 진 지 한참 되었고

까만 어둠 속에 흰 눈이 쌓였다. 


그날 봉평 산골짜기에는 

억수같이 눈이 내렸고

여린 나뭇가지는 눈 무게를 견디느라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고

어디선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눈보라는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지고 

시린 바람은 비수같이 외투 틈을 헤집었고 

나는 눈보라의 황홀함에 몸을 떨었다. 


동화 속에서나 봄 직한 

작은 등불  희미한 산골 집 지붕 위에는

전설처럼 눈이 쌓이고        

어디선가 들려온 쇼핑의 녹턴 20번은 

눈 내리는 겨울밤을 애수에 젖게 했다. 


본디 봉평은 하얀 메밀꽃이 지천인데

가을 지난 지 오랜 그해 겨울은 

논밭에 하얀 쌀가루가 지천이라 

겨울에도 메밀꽃이 피었나 착각에 빠졌다.  


이제는 세월이 하도 흘러 

젊고 푸른 내 모습은 사라지고

귀밑에 하얀 눈이 내리는

초췌한 중년이 되어

그날 오후 봉평에 왜 급히 가야 했는지  

내버려 둔 기억은 흐릿하고

그 사연은 뭐에 그리 중요할까

두고두고 곱씹은 추억만 선명하다. 


오늘 아침에 눈이 내리길래

눈을 흠뻑 맞을 요량으로 

차를 두고 버스를 탔다.  

야속하게도 성긴 눈마저 금세 그치고

잿빛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하늘이 얼굴을 빼꼼히 들이민다. 


비는 도시의 속살을 드러내지만 

눈은 도시의 민낯을  분칠 한다. 

높고 낮음도 없고

더럽고 깨끗함도 없이 

내리는 눈은 세상을 흰색으로 덮는다.  


그런 날이면 따뜻한 핫초코 한 잔에

쇼핑의 녹턴 20번을 들어야 제격인데

내리던 눈은 맥없이 그쳤고

창밖으로 휑하니 부는 겨울바람과  

시린 겨울 거리를 본다. 




 





작가의 이전글 무심한 겨울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