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산사

by Henry


천 년의 언어

긴 추석 연휴. 고속도로마다 차들이 고향을 떠나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강원도의 깊은 산사. 연휴의 끝자락인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을 비워 이곳으로 갔다.


주지 스님께서 <벽암록(碧巖錄)>을 번역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석 달 전이었다. 벽암록은 송나라 설두중현(雪竇重顯) 선사가 엮고 원오극근(圓悟克勤) 선사가 해석을 단 고대 중국 선승들의 공안집(公案集)이다. 선사들의 깨달음의 순간이나 문답을 모아놓은 책. 스님은 그것을 일반인도 알기 쉽게 풀어내는 중이시다.


지난번 산사를 찾았을 때, 스님께서 원고를 다듬는 일을 도와달라는 조심스러운 요청이 계셨다. 허걱, 경전 번역에 도움이라니?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경전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내가 경전을 어찌 알겠으며, 더구나 공안집 번역이라면 감히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이었다. 어쨌든 말씀이 있었으니, 그 일을 돕기 위해 산을 올랐다.


"마른 똥막대기가 무엇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이 같은 화두 앞에서 나는 늘 멍해지곤 했다. 그런 내가 스님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차라리 정원의 잡초나 뽑고 가는 것이 더 도움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연로하신 노스님이 정진하는 일을 마다할 수 없는 노릇이고 보면 내 처지도 난처했다.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산문을 오르며 나는 조심스럽게 제안을 준비했다. "스님, 요즘 똑똑한 AI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활용해 보면 어떨까요?" 사실 연세가 팔십을 넘으신 분이라 싫은 내색이나 거절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스님의 대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좋지, 그것도 인연 아니겠나."


그렇게 의논을 마치고 스님께서 번역하신 첫 부분을 USB에 담았다. 깊은 산사에 계신다고 현대 문명을 멀리하지 않으시는 스님의 열린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집으로 돌아가 여러 AI와 함께 원고를 살펴보기로 했다. USB를 가방에 넣고, 그날 밤 나는 큰 소원 방에 여장을 풀었다.


빗소리와 로망스

목요일,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현불사의 인적을 끊어놓았다. 요사채 앞 정원에는 쑥부쟁이, 구절초, 큰금계국, 개미취, 샤스타데이지, 검은눈천인국, 밀짚꽃, 참취꽃, 산수국이 빗방울을 맞으며 고개를 숙인다. 비에 젖은 들꽃이 한참이나 애처롭고 아름답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하며 세상과 나 사이에 투명한 장막을 드리운다.


비의 군사들이 공중에서 낙하한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당의 돌을 적시고, 나뭇잎을 두드리고, 땅으로 스며든다. 이 고요한 방문 속에서 나는 큰 소원 방 앞 마루에 앉아 기타를 든다.


스님이 거처한 방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산사다. 이런 곳에서 기타를 연주한다는 것, 나무와 돌과 비만이 청중인 작은 음악회를 연다는 것.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로망스의 선율이 빗소리와 엉킨다. 1절을 뗐으니 이제 2절을 익힐 차례다. 서툰 손놀림이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비가 들을 뿐이고, 꽃들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기타 연주를 접고, 우산을 들었다. 그리고 사찰 옆 언덕길로 올랐다. 언덕 위 포매지로 가는 길이다. 비에 젖은 임도는 촉촉하게 반짝이고, 발아래서 흙냄새가 피어오른다. 한참을 걸었다. 빗속을 걷는 일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내 귓가를 채운다.


포매지에 이르렀을 때, 수면 위로 내리는 빗방울들이 물 위에 동심원을 그린다. 수많은 원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또 생겨났다 사라진다. 그 무상함이 아름답다. 저 원들처럼 우리의 생각도, 감정도, 만남도 그렇게 일었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들녘은 황금빛으로 변하고 있다. 가을은 이렇게 깊어간다. 비는 계속 내리고, 젖은 낙엽이 발길에 밟힌다. 나는 비에 젖은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생각한다. 산이 깊고, 가을이 깊고, 그 속을 걷는 내 마음도 함께 깊어진다.


깊어 가는 인연

사찰로 돌아오는 길, 요사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인다. 누군가 불을 지폈나 보다. 그 연기마저 비에 젖어 무겁게 땅으로 내려앉는다. 나는 다시 큰 소원 방 앞 마루 앉는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기타를 든다. 로망스 2절, 오늘은 이것을 연주해 보자.


비 오는 날 산사의 시간은 이렇게 흐른다. 더디고, 고요하고, 깊다. 서두를 일도 없고, 조바심낼 것도 없다. 다만 이 순간, 빗소리와 기타 소리가 어우러지는 이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녁이 되면 비가 그칠까. 아니면 밤새 내릴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이제 도시로 돌아간다. 가을은 깊어 가고, 로망스 연습은 계속될 것이다. 어느 선사의 말처럼 '가는 곳마다 좋은 인연'이다. USB 속 원고를 집에서 열어볼 것이다. AI와 함께, 스님께서 천 년 전 선사들의 언어를 풀어내시는 일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인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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