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역사의 추억
도시에는 두 개의 역이 있다. M은 그중 옛 거리가 가까운 역에서 내렸다. 십 년도 더 전에 백화점이 생기면서 역을 새로 리모델링했다. 그 덕분에 낡고 초라했던 역사가 매끈하게 변했다. 모처럼 그곳을 찾은 M은 잠시 개찰구 앞에 멈춰 섰다. 옛 모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겹치지 않았다.
공간 기억은 이상하다. 평소 눈여겨보거나 익숙지 않으면 쉬 잊힌다. 사라진 지 며칠만 지나도 모양이 생각나지 않는다. 도시의 옛 역사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많이 흐른 탓도 있지만, 그때의 모습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낡고 초라한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추억만 아련하다.
사람은 공간 자체보다 그 공간에서 겪은 감정을 기억한다. 벽지 무늬나 천장 높이 같은 건 잊어도, 그곳에서 느낀 설렘이나 초조함은 오래 남는다. M에게는 역사의 꼭대기가 돔 모양인지, 대합실이 길쭉했는지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시계를 보던 느낌, 개찰구 너머를 응시하던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얼굴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 M에게 공간은 그런 감정들의 배경이다.
그해 가을 M은 서울에서 자주 이곳으로 왔다. 역사에는 그녀가 기차에서 내리는 M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그녀가 개찰구 너머에서 손을 흔들던 모습. 하지만 이제 M을 반긴 것은 밝은 대리석 바닥뿐이었다. 깔끔한 현대식 내부는 M이 기억하던 것을 망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곳곳에 자리한 디지털 안내판이 역무원을 대신했다. M이 기억하는 낡은 대합실과 옛 광장, 그리고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합실로 나가는 계단 앞에서 M은 잠시 멈춰 섰다. 계단도 예전과 달라졌다. 하지만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 없다. 에스컬레이터는 분명히 없었다. 난간은 은색이었던가, 검은색이었던가. M에게 중요한 건 공간이 아니었다. 그때 그 감정이, 그 시간이 정말 있었는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M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개찰구를 나서자 바로 백화점과 연결되었다. 거대한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화려한 조명 아래 명품매장이 줄지어 서 있었다. 1층 로비에는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고, 반짝이는 쇼윈도 너머로 마네킹들이 가을 신상을 뽐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 쇼핑백을 든 연인들, 커피 한 잔을 들고 서성이는 직장인들이 보였다. M의 눈에 백화점은 도시인의 화려한 성찬의 공간이었다.
그해의 그 거리로
M은 백화점의 화사함을 뒤로하고 옆문으로 빠져나갔다. 역 앞 지하도를 건너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도를 지나 반대편 계단을 오르자, 도심으로 이어지는 초입이 나타났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지만, 거리에는 그해 가을의 흔적이 남았다. 모처럼의 여행이었으므로, M은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이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었다.
가로수 잎은 벌써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할 만큼 시간이 지났다. 그 세월이 천천히 물결처럼 머리를 스친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발걸음도 느려졌다. M은 한 발 내디디며 시간 속으로 걸어갔다.
새로 정비한 인도를 따라 낡은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거리는 잘 단장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페인트칠이 새로 된 벽면, 교체된 타일, 하지만 원래 건물의 골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2층 창문의 높이, 계단의 폭, 좁은 문틀까지 그다지 변한 게 없다. 간판만 바뀐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M은 발걸음을 멈추고 간판 너머를 들여다본다. 그 계절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시간의 물결은 스치듯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을 뿐, 이 거리의 숨결은 그해 가을 속에 머물러 있었다. M에게는 반가운 풍경이었다.
시간이 멈춘 곳
거리를 내려오다 왼쪽 길로 발길을 돌렸다. 오래된 시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귀금속점, 전자상가, 구제 의류가게, 수입 식품점, 조명 상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좁은 골목길에 자리한 먹거리 가게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M은 어느새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옛날 사람들로 붐비던 골목이 이제는 한산하다. 개미굴 같은 골목의 시간은 그해 가을에서 멈췄다. 먼지 쌓인 쇼윈도, 색 바랜 포스터. 공기마저 멈춘 것 같았다. 오래된 사진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M은 시장 입구에 서서 이곳의 정보를 검색했다. 1950년,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이 시장이 생겨났다고 적혀 있었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만든 공간. 그 사실을 알게 되자 M의 눈에 지금의 한산한 골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과 시계, PX 물품들이 거래되던 곳. 사람들은 이곳을 '양키 시장', 혹은 '도깨비시장'이라 불렀다. 단속반이 오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시장. 불법과 생존 사이를 오가던 곳. 그 설명이 M의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M은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이 시장은 '교동시장'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었다. 교동(校洞). 조선시대 향교(鄕校)가 있던 동네라는 뜻이었다. 향교는 훗날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지금도 그 이름은 남아 있었다.
다시 흐르는 시간
1970-80년대 교동시장은 보따리 무역과 수입품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M은 화면에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한산한 골목이지만, 상점마다 아직도 그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M에게도 이 시장의 추억은 각별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처음으로 청바지를 사려고 이곳에 들렀다. 질 좋은 데님 청바지를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M은 그날의 설렘을, 청바지를 고르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시장의 크기와 모습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상가도 그대로이다. M의 눈앞에는 여러 시간이 겹쳐 있었다. 조선시대 향교의 기억, 전쟁 직후 피난민들의 생존, 1970년대의 번영, 청바지를 사던 그날의 설렘, 그리고 지금의 고요. 시간은 차곡차곡 쌓이는 게 아니라 한 공간 위에 겹쳤다. M에게는 그 시절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 속에 스며들어 있다.
물 흐르던 시간이 이곳에서 단단히 얼어붙었다. 하지만 꽁꽁 언 얼음 아래서도 물이 세차게 흐르듯, 이곳도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에 멈춘 시간도 해빙되어 새로운 시간과 함께할 것이다.
이제는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도깨비야시장'이 열린다. 70년 전 도깨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던 그 시장이, 이제는 당당히 밤을 밝힌다. M이 떠날 무렵, 젊은 연인들이 하나둘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도 언젠가 이곳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추억이 오래된 시간 위에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