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諸行無常)

by Henry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법구경』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전도서』도 말한다. "해는 떴다가 지며, 바람은 이리 돌며 저리 돌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른다." 만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한다는 뜻이다.


교동시장도 흐르고 있다. 다만 그 흐름이 너무 느려서, 멈춘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시장은 1950년대의 외형을 간직했지만, 그 안의 가게도 물건도 사람도 끊임없이 변했다. 시간은 골목의 겉모습은 그대로 두고, 그 속은 조용히 모습을 바꿔왔다.


세상의 이치는 이처럼 모순 투성이로 비친다. 변하지 않았지만 변했고, 그 자리에 있지만 사라졌다. 시계의 시간은 흘러도, 마음의 시간은 멈춰 있다. 시간은 켜켜이 쌓이고 얽히며, 사람들은 그 중첩된 시간 속에서 현재를 살뿐이다.


느리게 흐르는 것은 더 큰 무상(無常)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매일 보는 풍경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모든 것이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음을 깨닫는다. 그 옛날 골목을 걷던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시절도 결국 가 버렸다.


공간의 과거와 현재는 시계적 순서로 배열되지 않았다. 낡은 건물의 벽, 좁은 골목의 냄새,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과거를 현재 속으로 불러들인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1950년대 피난민이 걷던 그 길을 2025년 MZ세대가 걷는다.


M은 시간 여행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기웃댄다. 그해 가을의 자신을 찾아 나선 여정이다. 이곳의 기억은 다시 시간의 층위에 한 층을 쌓아 올릴 것이다. 언제 다시 오리라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오늘의 기억이 쇠잔해지면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런던제과에는 런던의 맛이 있었을까

교동시장을 벗어난 M은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금 더 내려오자 어디쯤인가 대리석 건물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에는 건물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있었던가? M은 기억이 흐릿해 당황했다.


이 거리엔 해가 저물고 전등 불빛 켜지면 작은 책방이 열렸다. 철 지난 소설책과 빛바랜 시집, 오래된 엽서와 소품이 좌판 위에 펼쳐졌다. 때로는 성적 호기심에 눈뜬 청소년들이 그곳에서 금서(禁書)를 뒤적이기도 했다. 그 시절, 어둠 속에서 은밀히 피어난 욕망조차 도시의 기억의 일부였다. M의 기억은 흐릿해도 그 장소의 알싸하고 은밀한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M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장소의 기억을 되살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한때 유명했던 동아백화점에서 내려오는 사거리를 만났다. 왕복 2차선 도로는 그대로였다. 도시 남쪽에 자리한 백화점에는 못 미쳤지만, 한때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그땐 뭐가 그리 급했던지 서둘러 이리저리로 발길을 옮겼다. 살아야 할 시간이 이리 길 줄 알았다면 그리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거리 오른쪽 모퉁이에 런던제과가 있었다. 파리바게트가 생기기 훨씬 전, 이 도시에는 뉴욕제과, 런던제과처럼 외국 수도 이름을 딴 제과점들이 많았다. 뉴욕도 런던도 가본 적 없던 사람들이 빵 한 조각에 이국의 꿈을 담았던 시절이다.


사람들에게 런던제과는 빵맛보다 만남의 설렘으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M은 런던제과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편리한 좌표였을 뿐, 아련한 감정을 새기지 못한 공간이었다.


두 개의 시간이 겹쳐진 거리

M은 이제 겨우 시간 여행의 첫걸음을 뗐다. 그가 걸어온 그해 가을의 거리는 아직도 멀다. 거리 풍경은 달라진 듯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크게 변한 게 없다. 교동시장에서 동성로로 이어지는 이 거리에서, 건물은 대부분 원래 모습 그대로다. 일부는 용도가 바뀌고 새 건물이 들어섰긴 했지만, 거리는 그해 가을의 모습을 간직했다.


거리는 두 개의 시간으로 겹쳐져 있다. 낡은 백화점이 사라지고, 옛 극장은 닫혔다. 그 자리에 현대식 주얼리 매장과 휴대폰 가게가 들어섰다. LED 간판이 밝고, 유리 쇼윈도가 반짝인다. 새것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광고하며 옛 건물을 차지했다.


교동시장의 건물들은 다르다. 벽돌의 무게, 골목의 냄새, 타일의 균열. 2층 창문의 녹슨 철창, 페인트가 벗겨진 문짝, 시멘트 틈새의 이끼. 이것들은 어떤 말로도 다 담기지 않는다. 아무리 새로운 이름을 붙여도, 건물들은 자신의 침묵, 자신의 무게를 놓지 않는다.


시장의 건물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M은 건물의 낡은 벽돌을 만져본다. 거칠고 차갑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요철, 세월이 새긴 흠집들. 그것은 시간이 응고된 물질이고, 역사가 침전된 흔적이다. 이 벽돌을 쌓았던 사람의 손길, 전쟁의 포연, 여름의 뙤약볕과 겨울의 찬바람이 모두 이 속에 녹아 있다.


옛 것과 새것, 두 시간은 싸우지 않는다. 다만 서로를 밀어내지만, 결국 공존한다. 드러남과 숨음, 말과 침묵. 그 긴장 속에서 교동시장과 동성로는 살아간다. 이곳의 현재는 과거를 품고 있고, 동시에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


음악이 흐르던 그 자리는 사라지고

M은 옛 런던제과를 오른쪽으로 돌아 사잇길로 들어섰다. 한때 M의 우울한 청춘을 달래던 음악 감상실을 찾아 나섰다. 그곳 이름이 <쉘부르의 우산(Les Parapluies de Cherbourg)>이었던가? 아니면 M이 그곳에서 그 음악을 자주 들었던가? 그 기억은 사라져도 그곳의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때 들었던 <어느 개인 날 아침 갑자기(Par un beau matin d'été)>의 휘파람 소리와 트럼펫 소리는, 심약한 영혼의 애절한 진혼곡이었다. 그때 이미 애늙은이가 된 M은 옛날 프랑스 영화 음악에 빠져 있었다.



골목 초입에는 ○○살롱이라는 건물이 자리했다. 1966년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힌 간판이 가게의 역사를 말해준다. 그 옆으로는 옛날 건물들이 그대로 늘어서 있다. 이곳의 시간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변화는 시작되었다. 좁은 골목길 중간에 이르자 주상복합을 추진한다는 플래카드와 함께 안전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공사를 알리는 판이 시야를 차단했다. 옛 모습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의 시간도 해빙되어 흘러갈 모양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음악감상실 자리는 온데간데없다. 그 골목 어디쯤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찾을 길 없다. 그때 즐겨 듣던 노래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지만, 그 공간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때 함께 음악을 듣던 그 소녀를 지금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공간과 사람의 기억은 사라지고 느낌과 설렘만 남았다.


그해 가을로 가는 여행은 쉽지 않다. 이름도 잊힌 장소를 찾는 일은 번번이 난관에 부딪친다. 그래도 M은 시간 여행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해 가을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M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그때 그 골목의 냄새만큼은 그대로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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