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맞을까?
골목을 헤매던 M은 마침내 그 자리를 찾았다. 아니, 찾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자리는 이미 사라졌으니까. 다만 M은 여기쯤이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좁은 계단을 올라 2층 문을 밀고 들어서면, 조용한 어둠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던 그곳. 진짜 여기가 그곳일까?
음악감상실 <쉘부르의 우산(Les Parapluies De Cherbourg)>. 프랑스어 철자가 정확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M은 그 이름이 주는 낯선 향취에 이끌려 그곳을 찾았다. 프랑스 영화 본 적이 있었던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M에게 쉘부르는 어딘가 먼 곳,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상징했다.
실내는 희미했다. 작은 스탠드 몇 개가 자리를 밝힐 뿐, 천장의 형광등은 꺼져 있었다. 주인장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전기료를 아끼려 했는지 알 수 없다. 어둠은 M에게 위안이었다. 초라함과 우울함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좋았다.
담배를 피웠던가? 아마도 담배를 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음악 감상을 방해한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의자들이 앰프를 향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마치 작은 콘서트홀처럼.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음악을 들었다. 기침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곳은 음악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 시절 M은 중이염을 앓고 있었다. 양쪽 귀의 고막이 손상되어 소리가 낮게 들렸다. 병원에서는 수술 결과를 장담하지 못했다. 가끔 세상의 소리는 왜곡되어 들렸다. 하지만 음악감상실에서는 괜찮았다. 조용히 앉아 듣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음악은 M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마음을 위로했다.
주인장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손님이 들어와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카운터에 가서 입장료를 내면,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커피가 나왔던가, 아닌가? 그냥 음악만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공간의 느낌과 아늑함은 살아 있다.
M은 뒷줄 구석 자리를 좋아했다. 거기 앉으면 다른 사람들의 뒷모습만 보였다.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모습을 보며, M은 자신도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음악을 사랑하고, 비록 가난하지만, 낭만적인 사람.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비가 내렸다.
음악이 끝나고 밖으로 나서면, 아득한 현실이 M을 짓눌렀다. 주머니는 비었다. 뭘 할 것인지 몰랐다. M에게는 계획도, 전망도 없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틸 뿐이었다.
<쉘부르의 우산>을 듣고 나온 어느 날, 비가 내렸다. M은 우산이 없었다. 우산을 산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M은 비를 맞으며 걸었다. 옷이 젖고, 신발이 질척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급히 걸어갔다.
M은 빗속을 걸으며 생각했다. 밤이 되고 세상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 비 내리는 소리가 선명해진다는 것을. 그 순간 M의 머릿속에서는 <쉘부르의 우산> 선율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 음악이,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문득 피천득의 문장을 떠올렸다. 그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그 대목을. 연두색 우산.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러 뛰어가던 아사코. 그 장면이 왜 그리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결핍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천득은 아사코의 연둣빛 우산을 평생 기억했다. 훗날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보며, 그것이 아사코의 우산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M은 그 고백을 들으며 숙연해졌다. 누군가를 그렇게 오래 기억한다는 것. 그런 기억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훗날,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나온 지 20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M은 그 음악을 처음 들었다. 스무 살 청년이었던 M은 음악감상실에서 미셸 르그랑의 선율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난 후, M은 비로소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쉘부르의 우산〉.전쟁으로 헤어진 연인들이 각자의 삶을 살다 눈 내리는 성탄절 주유소에서 재회하지만,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과 가정을 이룬 뒤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M은 눈을 떼지 못했다. 화사한 색채 속에서 펼쳐지는 슬픔. 주인공들의 사랑은 전쟁 앞에서 무력했다. 눈 내리는 주유소에서 재회한 두 사람.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기억했지만, 여자는 담담했다. 짧은 인사만 남긴 채 차를 몰고 떠났다.
사랑은 그렇게 어긋났다. 한쪽이 간직하는 동안, 다른 쪽은 잊었다. 쉘부르의 우산은 비를 막아주지만, 사랑의 어긋남은 막아주지 못했다.
시간을 건너 돌아보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M은 <쉘부르의 우산> 음악 감상실을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미셸 르그랑의 선율이 흘러나오던 그곳을. 그때 M은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그 음악 속에 어떤 슬픔이 있다는 것, 그 슬픔이 아름답다는 것만 느꼈다.
이제 M은 안다. 그 음악이 왜 그토록 선명하게 마음에 스며들었는지를. 성치 않은 귀로 더 깊이 들었다. 불안한 청각이 오히려 완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제대로 들을 수 없는 M의 결핍이 오히려 더 큰 갈망을 불렀다.
비를 맞으며 걸었던 그날, M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겪는 그 순간이 훗날 누군가의 영화처럼, 누군가의 수필처럼, 적어도 M 자신에게는 아름다운 기억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피천득이〈쉘부르의 우산〉을 보며 아사코를 떠올렸듯, M도 그 영화를 보며 음악감상실의 어둠을, 비 맞으며 걸었던 그날을, 우산 없이 홀로 서 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것이 M의 '인연'이었다
남은 것들
"그 우산의 연둣빛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라고 피천득은 말했다.
M에게도 남은 것이 있다. 어둠 속에서 들었던 음악, 비를 맞으며 걸었던 골목. 온전히 듣지 못했던 그 선율이, 이제는 또렷하게 M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시절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얼마나 미래가 두려웠는지를 이제야 보듬는 M의 마음이다.
또 10년이 지나 M의 중이염은 치료되었다. 소리는 많이 선명해졌다. 하지만 M은 안다. 그 시절 잘 들리지 않던 귀로 들었던 음악이야말로 가장 깊이 들은 음악이었다는 것을.
M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음악감상실도, 좁은 계단도, 어둠 속의 스탠드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그 빛과 색채는 남아 있다. 연둣빛 우산도, 쉘부르의 거리도, 비 맞으며 걸었던 골목도. 모두 사라졌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선명하다.
가난했던 스무 살, 귀가 아팠던 청년, 미래가 보이지 않던 그 시절이 모두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M은 안다. 그 모든 결핍과 아픔이 M을 만들었고, 그 기억들이 지금의 M을 지탱하고 있다.
시간은 흘렀다. 음악감상실도 없다. 하지만 그날의 음악은 여전히 M의 안에서 울린다. 더 깊이 새겨진, 그 슬프고 아름다운 선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