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이의 행복
서울을 출발해 동탄을 지나 몇 번의 터널과 몇 개의 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려온 열차가 가쁜 숨을 몰아쉰다. 기억의 도시를 다시 찾은 M은 플랫폼에 발을 내렸다. 역은 사람들로 붐비고, 수많은 발걸음이 오간다. 북쪽 도시에서 막 도착한 사람들, 이제 그곳으로 떠나는 사람들.
떠나는 이는 행복하다. 가슴에 뜨거운 미래를 품었다. 돌아온 이는 설렌다. 손에 아련한 추억을 들었다.
M은 플랫폼 한가운데 서서 서로 엇갈린 길로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역은 오고 감이 이어지고, 만남과 결별이 일상이다. 희망과 좌절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는 문턱에서 애틋함이 잠시 머물렀다가 그리움이 거대한 물결 되어 흩어진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을 묻은 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역은 묵묵히 이들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각기 자기 삶의 무게가 실렸다. 가벼운 설렘도, 무거운 이별도, 희미한 기대도 모두 이 플랫폼 위에 잠시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어 올린다.
열차는 만남과 이별, 희망과 슬픔을 실어 나른다. 사람들은 잠시 숨을 고르고, 신발끈을 고쳐 맨다. 그리고 자신만의 도시를 향해 열차에 오른다. 그 짧은 순간, 모든 이의 마음에는 희미한 한 줄기 빛이 스친다. 플랫폼에 발을 내딛는 M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와 작은 긴장이 교차한다.
다시 찾은 그해 가을
역사 앞 광장은 지하도로 이어졌다. 한때 분수대가 있었고, 비둘기들이 날았던 넓은 공간. 지금은 손수건만큼 남았다. M은 멈춰 섰다. 기억 속 풍경이 눈앞의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분수대는 사라졌고, 광장은 쪼그라들었다. 과거와 현재가 어긋난 퍼즐처럼 삐걱거리며 맞물려 있다.
M은 알고 있다. 자신이 찾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해 가을이라는 것을.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시절이라는 것을. 시간은 이미 흘러갔고, 그때의 사람은 떠났다. 그 시절의 풍경도, 감정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M은 돌아왔다. 상처를 헤집지 말라는 충고를 뒤로하고, 그해 가을에서 겨울을 찾아 이곳에 왔다. 이 도시의 현재는 과거를 품고, 과거는 현재와 중첩되어 마치 빛바랜 필름처럼 겹쳐 있다. 오래된 두 시간이 서로 얽히며 꼬인 채 풀리지 않는다.
추억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위안이고, 어떤 이에게는 고통이다. M의 여행은 어느 쪽일까. 그는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때와 지금이 얽힌 시간의 매듭을 풀지 않는 한, 스스로가 답을 찾지 못하는 한, 이 깊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해 가을 파란 빛
M은 역 광장 끝의 지하도 계단 앞에 섰다. 도대체 몇 년 만인가.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나. 서울에서 내려오는 날, 이 계단을 올라 M은 <약속> 카페로 향했다. 청년의 발이 밟았던 계단을 중년이 되어 다시 밟았다. 어제와 오늘이 교차하는 시간의 문턱에서 M은 한참을 망설였다.
첫 계단에 발을 올리자, 발끝이 먼저 반응했다.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몇 개의 계단이었던가? 열두 개였던가, 열세 개였던가. 기억은 가물거렸지만 발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계단의 폭, 높이, 그리고 마지막 계단이 약간 삐걱거리던 감촉까지. 발끝이 먼저 그해 가을로 돌아갔다.
지하도를 건넜다. 풍경은 변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워진 것도, 그대로 남은 것도 아니었다. 낡은 건물에 새 간판이 붙었고, 사라진 가게 자리에 낯선 가게가 들어섰다. 차라리 모든 것이 새로웠다면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익숙함과 낯섦이 뒤섞인 이 거리는, 한 발 내디딜 때마다 M을 그해 가을로 끌어당겼다.
계절은 완연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왔다. 거리를 스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무거워졌다. 베이지색에서 검은색으로, 외투 깃을 세운 여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하지만 M의 발걸음은 여전히 그해 가을 속을 걷고 있었다. 그때도 이맘때쯤이었다. 가을이 겨울로 넘어가던, 계절의 경계였다.
M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울트라마린 블루, 코발트블루, 피콕블루가 층을 이루며 겹친 하늘. 그해 가을도 이런 하늘이었다. 투명하고 깊고 차가운 파란빛. 그 파란빛 아래서 M은 처음 그녀를 만났다. 하늘이 기억을 불러내고, 기억이 하늘을 물들인다. 파란빛의 깊이 속으로, M은 다시 그 시간 속에 잠겨 들었다.
발길이 기억하는 길
지하도를 건너 골목으로 접어들자, 몸이 기억하는 길이 시작되었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첫 번째 모퉁이를 돌고, 두 번째 골목을 지나고, 세 번째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마치 그 시절이 녹화 영상이 재생되는 것처럼, 발길이 길을 찾아간다.
M은 그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눈동자의 색깔이 어땠는지, 웃을 때 입꼬리가 어떻게 올라갔는지, 그런 세세한 것들은 시간 속에서 흐려졌다. 하지만 이 길은 또렷하다. 첫 번째 모퉁이의 각도, 두 번째 골목의 경사, 세 번째 네거리의 넓이. 그걸 몸이 기억한다.
사람의 몸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세상을 경험하는 주체다. 공간에 머무르고, 그 공간을 내면화한다. M이 그해 가을 그 길을 걸었을 때, 그의 발길은 그 길의 리듬을 익혔다. 어릴 적 배운 피아노 연주가 오래가듯, 몸으로 익힌 기억은 의식적 기억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 뜨거운 감정이 함께한 장소는 더욱 깊이 새겨진다.
M이 그해 가을 <약속> 카페로 향하던 그 길은 단순한 이동 경로가 아니었다. 설렘과 기대, 불안과 떨림이 함께한 감정의 통로였다. 골목을 도는 바람의 촉감, 멀리 들리는 도시의 소음. M의 감각들이 그해 가을을 불러냈다. 공간이 시간을 깨워, 그날의 날카롭고 예리한 설렘을 되살렸다.
집시의 예언
<약속> 카페를 다시 찾기 전날 밤, M은 잠 못 이루었다. 오랫동안 외면했던 과거의 매듭을 풀지 못한 탓일까. 그 깊은 불안과 긴장 속에서 M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M은 스스로 고립시켰던 내면의 속박을 벗어 던진 자유로운 방랑의 집시가 되어 있었다. 기억 여행을 시작한 후 늘 듣던 브람스의 음악 탓일까? 집시의 꿈을 꾼 것이다.
어둠이 내린 동유럽의 어느 마을 광장.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그 주위를 빙 둘러선 사람들 사이로 바이올린이 울린다. 처음엔 느리고 애잔하다. 고향을 영영 떠나온 이들이 그리움을 노래하듯이. 그러다 불길처럼 템포가 치솟으며 폭발한다. 그것은 슬픔 속에서도 삶의 춤을 멈추지 않는, 절망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집시의 삶이다.
브람스의 음악 안에는 헝가리안 집시의 슬픔과 기쁨, 방랑과 해방,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그건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이 집시들의 삶의 노래와 멜로디를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란, 그 모든 감정을 껴안고 흘러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머무르지 않고, 붙잡지 않고, 흘려보내는 집시들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운명. M은 그들 속에 섞여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춤을 추었다.
그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약속>에 갈 때마다 마치 BGM처럼 헝가리안 무곡이 들렸다. 그때는 그저 카페의 선곡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긴 방랑 끝에 이곳에 돌아온 M에게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M이 걸어야 할 길고 긴 방랑의 세월, 돌아오고 싶은 곳에 닿지 못할 슬픈 운명을 예고한 전조(前兆)였음을 M은 깨닫는다.
M은, 긴 시간을 돌아, 마침내 운명의 장소인 <약속>을 향해 걸어갔다. 바람이 스치고, 낡은 간판이 흔들렸다.
시간의 지층
낡은 풍경의 냄새를 맡는 순간, M은 곧장 알았다. 여기가 그때, 그곳이라는 것을. M은 순식간에 그해 가을로 돌아갔다. 이미 잊었노라고, 하마 잊었노라고 생각했던 원초적 아픔과 설렘이 뒤섞여 되살아났다. 바로 그 장소, 그 공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공간은 흐르는 시간을 묶어둔다. 탄소를 품은 공간이 수억 년의 시간을 땅속 깊이 가둬두었듯, 찬란히 빛나는 다이아몬드는 공간 속에 체화된 시간의 지층이다. 건물의 벽은 골목의 습기와 바람의 흐름을 켜켜이 쌓아 놓았다. 그것은 일상 속 시간의 지층이었다.
M은 깨달았다. 자신이 혼자 힘으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길모퉁이 골목길은 그해 가을을 불러냈고, 그해 가을은 M을 다시 <약속> 카페로 데려왔다. 공간과 시간, 이 둘은 M의 기억 여행의 원동력이다.
안타깝게도 언제 다시 만나자는 그 흔한 약속 하나 없었듯이 <약속> 카페는 사라졌다. 낯선 간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약속>은 언제 문을 닫았을까? 이제 M이 아니고서야 이 공간과 이름을 누가 기억해 줄까? 흔적은 지워지고, 낡고 색이 바랜 건물만이 그곳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덧칠을 했을까? 자취는 건물 외벽에 고스란히 남았다. 거듭 칠한 페인트가 층층이 다른 색을 드러내었다. 크림색, 연두색, 하늘색, 그리고 회색이 지질학적 단층을 이룬다. M은 나무의 나이테를 세듯, 손끝으로 그 색깔의 겹을 천천히 헤아린다.
많은 가을과 겨울이 이 벽을 스쳐 지나갔으리라. 억센 비와 거친 바람이 간판을 바래게 하고 벽에는 깊은 생채기를 냈다. 그때마다, 밝고 투명했던 <약속>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급기야 덧칠한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져 갈색 나무 속살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M의 뇌리에 그해 가을의 느낌은 여전히 투명하고, 그때의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M은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던 오후 햇살을 떠올렸다. 그날 M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공간과 시간도 움직임을 멈춘 채 함께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