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마저 감미롭다

by Henry
산토리니 건물

산토리니의 풍경

찬 바람이 어린 고양이의 발톱처럼 뺨을 긁고 지나갔다. 그러나 M에게 그것은 아픔이라기보다는, 그저 일상적인 감각일 뿐이었다. 0도 가까이 뚝 떨어진 기온은 M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시린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추웠다.


이곳에 올 때까지 기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곳에 오기 위해 지어낸 환상이었다. 기대는 사라졌고, 그의 어깨 위에는 안타까움이 짓누를 뿐이다. M은 마침내 이 자리에 섰다. 그는 지금까지 스스로 시간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시간이 본래 빗장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저 도망치고 회피하려 애썼던 M의 내심이 투영된 것이었다.


M은 회한에 잠긴 채 낡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회한이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함을 한탄하는 회상이다. 공간은 시간을 묶어둔다. M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믿으려 했다. <약속> 카페가 있었던 건물은 M에게 과거의 아픔과 설렘을 고스란히 밀봉해 둔 마음의 타임캡슐이었다.


낡은 외벽의 페인트층은 M에게 퇴적된 시간의 지층과 같았다. 손톱으로 긁으면 푸석한 가루가 회백색 먼지처럼 날릴 것 같았다. 그 먼지가 무엇을 의미하든, 중요한 것은 M이 기어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M에게는 그때의 애틋한 기억들마저 바람에 쓸려 사라질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이곳에 오기까지 왜 이토록 오래 걸렸을까. M은 그때 용감하게 맞서지 못하고, 비겁하게 회피했던 자신을 애써 잊으려 했다. 자신의 비루함을 마주보기가 끔찍하게 두렵고 싫었다. 그렇게 외면한 간 세월을 지나 겨우 마음을 다잡고 이곳에 섰다.


M의 눈앞에는 오랜 풍상에 지친 쇠락한 건물이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낡은 간판이 삐걱대는 소리는 M에 대한 조소와 원망처럼 들렸다.


M은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다. 이 건물의 하얀 벽은 햇살에 반짝였다. 앙증맞은 창틀에는 에게해의 파란 바다가 담겨 있는 듯했고, 맑은 날 창문 밖으로 내놓은 꽃 화분이 거리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 빛나던 시절, 산토리니의 하얀 풍경을 닮았던 <약속>은 어디로 갔을까?


잿빛 청춘의 자화상

M의 청춘은 까닭 모를 늪에 잠긴 눅눅한 잿빛이었다. 가난과 중이염, 그리고 난청은 늘 M을 주눅 들게 했다. 귓속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청춘의 패기는 고사하고 불안한 미래에 비관했다. 현실은 팍팍했다. M에게는 숨 쉬기조차 버거운 날들이었다.


그때는 서러움에 침묵하고 말수가 사라졌다. 끓어오르는 울음을 소리내어 뱉지 못했다. 까닭 모를 슬픔과 분노는 늘 목구멍에 걸렸다. 그럴 때마다 M은 허겁지겁 술을 들이부었다. 막걸리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귓속의 염증 부위가 욱신거렸다. 그 술잔에는 막걸리가 아니라 애달픔이 담겨 있었다.


M의 청춘은 막걸리 냄새가 밴 낡은 탁자와 좁은 골목 찻집을 헤맸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한탄하고, 오지 않을 세상을 슬퍼하며 술을 마셨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꼭두새벽의 고통이 찾아왔다. 신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고 쓰린 속이 M을 깨웠다. 잠 못 이룬 신새벽은 잿빛 현실이 늘 M의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M은 국내 최고 기업의 공채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최종 임원 면접에서 탈락했다. 면접장이 넓었고, 면접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통제할 수 없는 약한 고리가 먼저 끊어졌다. 그건 피할 수 없는 M의 결함이었다. 기쁨은 순간이고 좌절은 길었다.


M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살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에 묶여 있었다.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다수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 속에서만 자유를 꿈꿀 수 있었다. 그 점에서는 M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통마저 감미롭다

M은 막막한 현실이 버거웠다. 당시만 해도 중이염과 난청은 수술로도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취업이 힘들어진 형편이라 M은 생존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나마 책을 싫어하지 않은 M의 성격인 것이 다행이었다.


M의 고달픈 시간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M의 귀에 닿지 않았다. 학교 식당 구석 자리에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주변의 시끌벅적한 대화는 M과 다른 세상이었다. 밤늦도록 글을 쓰긴 했지만, 연필은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M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했고, 깊은 고독감은 계속됐다.


그러다 이곳에서 만난 <약속>의 계절은 지친 영혼의 작은 쉼터였다. 두 도시를 오간 그녀와의 만남은 M의 삶에 등대가 되었다. 낙엽 지는 가을, 눈 내리던 겨울, 그리고 새싹 돋는 이듬해 봄까지. 그 계절들은 M에게 온기를 주었다.


기쁨과 애틋함, 그리고 결별의 아픔이 M의 일생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시절 M의 조급함과 절박감, 끝내 모습을 드러낸 비겁함, M 내면의 모순이 그렇게 폭발할 줄 몰랐다. 너무 큰 기쁨을 주체하기에는 그때 M의 마음이 한참이나 미숙했다. 거기까지가 M에게 주어진 운명의 한계였다.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은 M의 영혼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 아픔을 견뎌야 했던 시간은 가혹했고, 대가는 혹독했다. M은 깊은 우울의 늪에 빠졌다. 영혼이 고통에 짓눌렸지만, M은 그마저도 감미롭게 받아들였다. 그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M은 그때 깨달았다. 무너지기 쉬운 내면과 깊은 외로움이 근원적인 문제라는 것을. 그 외로움이 육체의 병보다 더 깊고 고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약속>과의 결별은 단지 방아쇠였을 뿐이었고, 문제는 모순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M의 내부에 있었다. 원인을 찾기 위한 M의 여행은 그보다 더 이전을 향하고 있었다.

이전 10화<약속>에는 약속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