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의 기억 여행: 구조의 굴레에서 실존의 자유로

by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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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의 굴레에서 실존의 자유로

M의 기억 여행에서 1차 목적지인 <약속> 카페에 도달했다. 회한에 젖은 M은 당시의 착잡한 기억을 되살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아픈 과거를 회피하지 않으려는 M의 도전이다. 이제 그의 여행기도 새로운 전환점에 섰다.


M의 회상은 자신을 규정하는 구조적 제약과 그 안에서 자유로운 실존을 개척하려는 내면적 투쟁의 과정이다. 그의 기억 여행은 구조주의 철학이 주장하는 결정론적 한계 속에서 실존주의적 깨달음을 얻고, 궁극적으로는 그 두 가지를 통합하며 나아가는 전환의 과정이다.


두 힘의 대립: M의 삶을 둘러싼 구조와 실존

M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이 만들어낸 구조 속에 던져졌다. 그 속에서 '나'로서 존재하려는 실존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마치 거대한 수레바퀴에 묶인 채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처럼, M은 피할 수 없는 무게와 꺾이지 않는 의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했다.


M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조건들에 묶여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앓은 중이염은 그에게 평생 난청을 남겼다. 이것들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주어진 삶이었다.

국내 최고 기업 공채 최종 면접. 많이 준비했고, 그토록 원했던 자리였다. 하지만 면접관의 질문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통제할 수 없는 약한 고리가 먼저 끊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준비해도, 그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M은 그날 밤 깨달았다. 우리는 선택 없이 세계에 던져진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어느 날 이 세계에 '던져져' 있고, 그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피투성(被投性)'이라 부르지만, M에게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살아낸 현실이었다.


그해 가을의 강렬한 만남과 이별, 환희와 고통은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씨앗처럼 저장되어, 현재의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동했다. 긴 시간이 흘러도 그의 영혼은 여전히 그해 가을을 가리켰다. 이것은 집착이었다.


M은 알고 있었다. 과거는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현재를 지배하는 힘이며, 사라지지 않고 현재 속에 층층이 쌓여 그를 얽매는 구조라는 것을. 불교에서는 이를 '업(業)'이라 부르지만, M에게 그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M의 영혼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만 살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M의 내면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끊임없는 갈망이 솟아났다. M은 대부분의 사람처럼 왜 사느냐는 본질보다 어떻게 사느냐는 실존의 문제에 골몰했다.


친한 친구가 죽었다. M은 삶의 유한성을 실감했고,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강요한다. 삶이 유한하다면,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해 가을,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친 M의 비겁한 선택은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행위였다. 설혹 그것이 운명적인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 이후 M에게 남겨진 자유란, 아픈 결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그 작은 틈뿐이었다. 구조주의자들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실존주의자들은 바로 그 좁은 틈에서 스스로 길을 찾으라고 말한다.


전환의 시작: 비본래성의 자각과 고통의 직면

M의 삶은 몇 번의 격랑을 거쳤다. 그때마다 그의 생각도 바뀌었다. 처음 M은 그해 가을과 그 이전의 삶을 피할 수 없는 구조적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그 조건을 스스로 책임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실존적 행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 방식 전체의 변화였다.

M은 그해 가을의 비겁했던 순간을 통해 자기 민낯을 보았다. 용감하게 맞서지 못하고 비겁하게 회피했던 자신을. 그는 애써 잊으려 했다. 하지만, 이 비겁함은 M의 영혼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는 깊은 우울의 늪에 빠졌다.


M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다. 남들이 정해놓은 방식대로,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대로, 자신의 진짜 가능성을 회피하며 살았다. 철학자들은 이를 '비본래적 실존'이라 부른다. 바로 이 고통이 전환의 씨앗이 되었다. M은 깨달았다. 문제는 밖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었다는 것을.


<쉘부르의 우산>과 <어느 아름다운 여름 아침에>를 들을 때 불안한 청각이 오히려 완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을 들을 때 육체의 결핍이 영혼의 더 깊은 곳, 근원적인 외로움을 직면하게 했다. 온전히 들을 수 없기에, M은 더욱 깊이 느꼈다. 결핍은 M을 더 깊은 곳으로 인도했다.

실존적 외로움의 수용과 결단의 수행

M은 자신의 외로움을 더 이상 관계의 결핍이나 이해의 부재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는 순간부터 생기는 실존적 외로움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외로움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전환이었다.


M은 깨닫는다. 아무리 사랑받아도, 친구가 있어도, 가족이 있어도, 결국 삶과 죽음을 마주하는 존재는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에 선 단독자'와 같다. 우리는 모두 궁극적으로 혼자이며, 그 고독 속에서만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다.

M은 생각을 고쳤다. "나는 외롭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쉽게 살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나는 외롭다. 그것은 내가 깊이 살고 있다는 증거다"로. 외로움은 피해야 할 결핍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살아 있음의 증거였다.


M의 기억 여행은 도피가 아니다. 끊임없는 회상, 이 집요한 자기 성찰은 과거의 선택에 대해 현재의 M이 책임을 지는 행위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M의 기억 여행은 과거로부터 온 자신을 찾는 자기 이해의 순환이자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을 직면하는 용기이다. 그해 가을의 비겁함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M은 비로소 현재의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던져진 조건과 선택하는 자유

여행의 끝에서, M은 구조와 실존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했다. 던져진 조건과 선택하는 자유, 피할 수 없는 과거와 책임지는 현재. M의 기억 여행이 도달한 곳은 바로 이 둘의 통합이었다.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것이다.


M은 비겁했던 과거의 선택,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 그 선택을 통해 '용기 없는 M'이라는 내면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 기억을 응시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내면의 문제를 인식하고 고치려는 행동, 그것이 곧 M의 실존이 되었다.


과거의 선택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의 선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이 실존의 자유이다.


M은 자신의 고독과 외로움이 자기 회피가 아니라, 자기 인식에서 비롯될 때만 가능하다는 '고독의 품격'에 도달했다. 깊이 느끼고, 깊이 사랑하고, 깊이 질문하는 사람만이 이 외로움을 경험한다. 천박한 외로움은 자기 회피이고, 품격 있는 고독은 자기 인식이다.


M은 자신의 상실과 고통을 <헝가리안 무곡 5번>과 <어느 아름다운 여름 아침에> 같은 음악을 통해 예술로 변형시켰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가 말했듯,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예술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M은 기억을 언어로 담아내며, 사라진 것들을 추억으로 변형시키는 '시간의 연금술사'가 되었다.


M의 삶은 던져진 조건 속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조건을 자신의 선택과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깊이 살고 있다는 증거로 승화시키는 실존적 용기의 기록이다. 그는 구조의 포로가 아니라, 구조를 자각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찾아낸 실존의 주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이것이 M의 기억 여행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우리는 모두 던져진 존재이지만, 그 던져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M이 굳이 아픈 과거를 찾아 기억 여행을 떠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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