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난 후에

by Henry


시지프스는 행복하다.

용기란 두려움이 사라진 후, 문제가 해결된 후, 방법을 알고 난 후에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용기는 두려움에 싸일 때, 방향을 모를 때 가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길에서, 어떤 것도 안전하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이 용기다.

그런 용기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렇다고 용기를 낸다고 다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끝내 일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행동하지 않고 도망갔다는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훗날 그때를 회상하며 비겁하게 도망갔다는 후회와 회한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알제리 출신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영원히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를 이야기한다. 시지프스는 신들을 속이고 죽음의 질서를 거부했다. 그 벌로 영원히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려야 한다. 시지프스가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리면, 바위는 다시 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스의 형벌은 처음부터 달성할 수 없는 가혹한 것이었다. 끝없는 실패만이 예정된 부조리한 운명이다. 그런데도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라고.


시지프스가 행복한 이유는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부조리한 운명을 직시하면서도 계속 바위를 밀고 있다. 결과가 아니라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용기는 부조리를 인식하면서도 계속 그것과 맞서는 것이다. 마치 시지프스가 예정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바위를 미는 것처럼.

두려움 속에서도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 우리는 결과에 따라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가 된다.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는 외부가 규정한 삶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산다.


시지프스가 산 아래로 내려가 다시 바위를 향해 걸어가는 그 순간, 그는 자유롭다. 신들의 형벌도, 운명의 무게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껴안으며,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주인이 된다. 고통마저 행복한 기묘한 역설이다.


우리의 용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승리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진정성을 향한 길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가 불확실할 때, 모든 것이 안갯속에 싸여 흐릿할 때, 끝내 실패로 끝나면 파멸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리는 결단이어야 한다.


연극이 끝난 후에

우리는 종종 용기를 오해한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왜 그랬을까" 반성하는 것,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 그것도 용기라고 여긴다.


브람스의 음악과 함께 기억 여행을 떠나는 M이 그렇다. M은 그해 가을의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본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어떤 이는 이런 M의 자기 고백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M의 기억 여행은 용기가 아니다. 과거의 회고와 회한이다.

결말을 알고 난 후의 행동은 뒷북치기다. 결과를 모르기에 두려웠고 겁났다. 그래서 결정적인 상황에서 도망쳤다. 일이 끝나고 난 후 '나는 그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후확정편향일 뿐이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왜 용기 있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정면으로 그 순간을 마주하기에 두렵고 겁이 났기 때문이다.

M은 어쩌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처한 조건이었어. 어쩔 수 없었어.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 하지만 바로 이런 변명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다.


M은 그해 가을로 돌아가 자신을 관찰한다. 그때 용기를 냈더라면 하고 자신을 책망한다. 그것은 이미 끝난 장면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객석에 앉은 관객이 연극을 반추하며 안타까워하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회고는 용기가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진정한 용기는 이런 회고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정한 용기는 과거를 회고하는 자책이나 미래의 보장을 기다리는 수동성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앞서-달려가-봄'을 요구한다.

이는 죽음을 회피하거나 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라는 뜻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한계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깨닫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일주일 후에, 혹은 한 달 후에 죽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나중에", "언젠가", "조건이 갖춰지면"이라는 말은 사라진다.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지점을 강조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이 정해준 대로 살 수 없다. 남들의 시선, 사회의 관습, 안전한 선택—이런 것들이 무의미해진다. 오직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내가 선택한 삶만이 중요해진다. 시간의 유한성이 우리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이끈다.

인간에게 죽음은 가장 확실하면서도 가장 불확실한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온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어떻게 올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마치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일인 것처럼, 아직 멀리 있는 일인 것처럼.


하지만 하이데거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난다면, 남들의 평가나 실패의 두려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답게 살았는가?'뿐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실존'이다. 세상이 정해준 역할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 한계 때문에 더욱 절박하게 현재를 선택하는 것이다.




새로 시작하는 M의 여행

M은 마침내 그해 가을의 그 장소를 찾아갔다. 오랫동안 회피하던 기억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것은 용기였을까? 아니다. 이것은 여전히 과거를 향한 시선이다. 이미 끝난 무대를 확인하러 간 것일 뿐이다.


M 앞에는 아직 열려 있는 미래가 있다. 유한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절박한 시간이 있다. M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십 년 후일 수도, 그 후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용기는 과거를 돌아보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이제 M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과를 알 수 없고, 성공도 보장되지 않지만, 그런데도 자신의 고유한 길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것. 그것이 용기다.

M의 기억 여행은 이제 그 시절에 멈춰 선다. 과거는 이미 과거다. 더 이상 내려갈 이유가 없다.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이 울려 퍼지는 그 시간 속에서, M이 발견한 것은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물음이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이 유한한 시간 속에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M의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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