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방의 지옥
지옥에는 불구덩이도 고문 도구도 없었다. 다만 세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출구도 창문도 거울도 없는 밀실. 그들은 가르생(남자 기자), 이네스(레즈비언 우체국 직원), 에스텔(상류층 여자)이다.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은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에 살을 찢는 도구나 불구덩이를 생각하며 지옥의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그곳은 조용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내려진 처벌은 단지 세 사람이 영원히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지옥이라고? 세 사람이 함께하면 힘들 게 뭐 있냐? 함께 친하게 지내면 지옥도 견딜 만한 곳이다. 과연 그럴까? 사르트르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가르생은 전쟁에서 도망친 겁쟁이다. 에스텔은 불륜으로 태어난 자기 아기를 죽인 살인자다. 이네스는 친구의 남편을 유혹해 파멸로 이끈 여자다. 각자 숨기고 싶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구원을 찾으려 한다. 내가 원하는 나로 인정받기를, 내가 감추고 싶은 나를 보지 않기를. 하지만 구원은 오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나를 원하지 않고, 나를 원하는 사람은 내가 원하지 않는다. 욕망은 엇갈리고, 시선도 엇갈리고, 상대에 대한 인정도 엇갈린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투명함이다. 거울이 없는 방에서 타인의 눈이 거울이 되고, 그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네스가 가르생의 비겁함을 조롱할 때, 그는 변명할 수도 없다. 거울 속 자신처럼, 그 판단은 정확하기 때문이다.
가르생의 비겁함도, 에스텔의 공허함도, 이네스의 악의도 모두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아니라, 타인이 보는 우리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닫힌 방에서는 도망칠 수도, 눈을 감을 수도, 귀를 닫을 수도 없다.
타인과 함께 갇힌 공간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세 인물은 영원히 서로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욕망해야 한다. 거울이 없기에 타인의 눈이 거울이 된다. 하지만 그 거울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숨기고 싶은 진실을 비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이 열린다. 가르생은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나가지 않는다. 혼자 있는 자유보다 이 지옥이 더 견딜 만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이 고통이지만, 타인 없는 존재는 더 공허하다. 그는 방 안으로 돌아서며 외친다. "타인은 지옥이다!"
이런 기막힌 역설이 있나. 우리는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바로 그 타인의 시선이 우리를 옭아맨다. 인정받고 싶지만, 판단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보이고 싶지만, 들키는 것을 무서워한다. 사르트르가 1944년에 쓴 이 희곡은 80년이 지난 지금, 더욱 절실한 예언이 되었다.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우리의 닫힌 방은 이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온라인 공간이다. 사르트르의 세 사람은 강제로 갇혔지만, 우리는 스스로 이 디지털 밀실로 걸어 들어간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SNS에 자신을 드러낸다. '좋아요'와 댓글을 통해 자신을 확인받기를 갈구한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디지털 세상의 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나갈 수 있다. 스마트폰을 끄면 된다. SNS를 탈퇴하면 된다. 그런데 왜 나가지 않는가?
자유가 두렵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말했다.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 우리는 자유가 주는 고립을 견디지 못한다.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다시 구속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르트르의 가르생처럼, 우리는 다시 닫힌 방으로 돌아온다.
나는 닫힌 방과 열린 방 사이를 오간다. 가끔은 홀로, 또 가끔은 타인과 함께. 완벽한 고독은 존재의 불확실성을 낳고, 완벽한 관계는 자유의 상실을 낳는다.
지옥과 자유는 선택이다
어쩌면 지옥은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닫힌 방에 갇혀 있거나, 열린 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우리는 문을 여닫을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있을 때는 고독을 견디고, 함께 있을 때는 타인의 시선을 견디며. 그것이 자유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함께 있다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는 이해받고 공감받고자 하지만, 누구도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때 외로움은 더 깊어진다. 곁에 있어도 그립다는 것, 눈을 마주쳐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혼자 있는 것보다 더 깊은 고립이다.
그리고 이 선택의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더 절박해진다.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다. 직장으로부터 해방, 자녀 양육으로부터 해방은 가용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동안 굳게 닫힌 방이 활짝 열린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감옥인가?
인간은 단독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다. 젊은 날 그토록 갈구했던 '타인으로부터의 해방'이 막상 노년의 시간 앞에 놓였을 때, 우리는 그 방대한 자유 앞에서 어지러움을 느낀다. 문이 활짝 열린 방을 마주하고도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는 우리의 뒷모습이 거기 있다.
사회적 역할이라는 외피가 벗겨진 인간은 초원의 수사자와 닮았다. 무리에서 벗어난 수사자는 힘만으로 생존할 수 없다. 암사자와 새끼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을 지키고 군림할 때 비로소 '라이언 킹'이라는 정체성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당당한 위용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길 없는 텅 빈 고립이다.
지금 나는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사는가, 아니면 고독의 미학을 즐기는가? 답은 내가 닫힌 문을 여는 방식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물리적 문이 아니라 마음의 문.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 세상과의 의미 있는 접촉을 위한 문을 열어야 한다.
쇼팽의 녹턴이 흐른다. 타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음처럼 사라진다. 그 뒤 찾아온 고독은 감미롭고 아름답다. 피아노 선율처럼 투명하고, 촛불처럼 은밀한 이 시간. 그러나 이 탐미적인 아름다움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나는 언제든 문손잡이를 돌릴 용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문밖의 누군가를 향해, 문 안의 나를 열어 보일 수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