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시도
월요일 이른 아침, 나는 늘 SRT를 타고 남쪽으로 간다. 1박 2일의 여정은 무척 바쁘다. 그곳에서 종일 일을 보고, 다음 날은 노모와 여동생 일로 도시 전체를 뛰어다닌다. 두 사람 다 몸이 불편하다. 그 뒤치다꺼리로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돌아오는 SRT 안에서 문득 생각한다. 사는 것은 무엇일까? 구조의 굴레와 실존의 자유 사이, 그 간격은 얼마나 클까?
생각은 꼬리를 문다. 그러다 문득, 위대한 성인들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크라테스, 붓다, 공자. 그들의 생각은 수천 년이 지나도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어떻게?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책을 펼쳤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것을 사유의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물리학자들이 본다면 욕먹을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해 보기로 했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는 것이다
사과는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지구 표면으로 끌려갈 뿐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감나무에서 감이 땅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높은 곳의 물체는 아래로 떨어진다고. 이것은 지구에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주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지구 표면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에서 분리된 사과는 먼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우주로 가지 않고 지구 표면으로 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 표면으로 이끌린다.
왜 그럴까? 지구가 당기기 때문이다. 그 당기는 힘을 중력이라고 한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중력이 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서로를 당기는 중력을 가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이끌리지 않는다. 중력이 너무 약해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보다 더 큰 질량을 가진 태양은 어떨까? 당기는 힘이 훨씬 크다. 그래서 지구를 포함한 많은 행성이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회전 운동을 한다. 먼 우주로 탈출하려는 행성들의 노력은 무산되고, 태양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행성들의 모임을 태양계라고 한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이들은 자신의 중력으로 버티기 때문에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려는 힘과 안으로 당기는 힘이 균형을 이루며 돌고 있다.
당기는 것도 아니다. 공간이 휘어진 것이다
당기는 힘은 왜 생길까? 사실 '당긴다'라는 말조차도 정확하지 않다. 태양 주위로 행성들이 끌려가는 이유는 태양 주위의 공간이 휘어졌기 때문이다. 인류 최고의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설명이다. 중력은 힘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휘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는 중력을 '물체가 당기는 힘'이라고 배웠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턴이 중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300년 동안 이 설명은 완벽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상상해 보자. 아주 얇은 커다란 고무판 위에 무거운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고무판이 움푹 꺼진다. 이제 작은 구슬을 그 옆에 굴리면 구슬은 자연스럽게 볼링공 쪽으로 굴러간다. 구슬이 볼링공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무판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우주 공간도 마찬가지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있으면 그 주변의 공간이 휘어진다. 지구도 질량을 가지고 있으니 지구 주변의 공간을 휘게 만든다. 그래서 공중에 떠 있던 물체가 지구 쪽으로 떨어진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휘어진 공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물질은 공간을 휘게 만든다
빛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물질은 질량을 가진다. 질량이 있다는 것은 그 주변 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뜻이다. 다만 질량이 작으면 공간의 휘어짐도 아주 작다.
사람의 몸도 질량을 가지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주변 공간을 휘게 만든다. 하지만 지구나 태양에 비하면 사람의 질량은 흔적도 없다. 따라서 그 휨의 정도가 너무 미세해서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사람 옆에 있는 물체가 사람 쪽으로 당겨지는 일은 없다. 공간의 휘어짐이 거의 없으니, 중력도 거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지구는 엄청난 질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구 주변의 공간이 크게 휘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중력이라고 부른다. 지구 위의 모든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주변에 질량이 큰 물체가 없는 깊은 우주 공간은 어떨까? 거기서는 공간이 휘어지지 않는다. 휘어짐이 없으니 중력도 없다. 이것을 무중력 상태라고 한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물체가 어느 방향으로도 떨어지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도 당기는 힘이 없기 때문에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져도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을 뿐이다.
사유에도 질량이 있을까?
깊이 사유한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을 끌어당긴다. 소크라테스, 붓다, 공자, 아인슈타인. 이들의 생각은 수천 년이 지나도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마치 거대한 천체가 주변의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휘게 만들듯이.
반대로 얕은 생각은 아무것도 끌어당기지 못한다. 순간 스쳐 지나간다. 공간을 휘게 만들 만한 생각의 무게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유의 질량"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물리 우주에서 질량은 주변 시공간을 휜다. 휘어진 시공간이 다른 물체를 끌어당긴다. 이것이 중력이라면, 사유의 우주에서는 어떨까? 깊은 생각은 주변의 다른 생각들을 끌어당긴다. 한 사람의 깊이 있는 통찰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자기 쪽으로 휘게 만든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생각해 보자. 무려 2400년 전의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플라톤을 지나간다. 그의 생각 질량이 워낙 무거워서 그 주변의 모든 사람의 사유가 휘어진다. 플라톤을 무시하고 철학할 수 없다. 현대 철학조차도 그의 사유 중력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칸트도 마찬가지다. 『순수이성비판』이라는 거대한 질량을 우주에 던져놓았다. 그 이후의 모든 철학은 칸트의 중력장 안에서 움직인다. 칸트를 따르든 반대하든, 그의 사유를 피해 갈 수 없다. 그 외에도 우리는 수많은 철학자의 생각 힘에 끌리고 있다.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의 질량에 이끌리듯이.
생각의 공간도 휜다.
우주에서 질량이 크면 시공간의 곡률이 크다. 태양 근처에서는 공간이 휘어지고 시간이 느려진다. 시간의 곡률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사유의 우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지 않을까? 깊은 사유 앞에서는 시간이 달라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고, 한 페이지를 읽는 데 30분이 걸리기도 한다. 사유의 밀도가 높은 부분에서는 시간이 느려진다.
하지만 가벼운 글은 빠르게 지나간다. 뉴스 기사, SNS 피드, 가벼운 소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사유의 질량이 작아서 공간을 휘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니체의 글을 읽으면 사유의 공간이 달라진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다르게 보인다. 같은 개념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유의 공간 자체가 휘어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다. 칸트도 마찬가지다. 흄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사유는 너무 무거워서 사상사라는 공간을 영원히 휘게 만들었다. 위대한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 예술가 등 이들의 사고의 중력은 일반인의 생각을 끌어당긴다. 아니,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유의 휘어진 공간으로 우리의 생각이 끌려 들어간다.
중력은 당기는 힘이 아니다. 공간의 휘어짐이다. 그렇다면 사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깊은 생각은 사유의 공간을 휘게 만든다. 그 휘어진 공간이 다른 생각들을 끌어당긴다. 이것이 사유의 중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