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말의 감옥을 벗어나 설국으로

by Henry



꿩 대신 닭을

아픈 동생을 대신해서 금융기관 일을 보러 갔다. 불필요한 보험과 은행 계좌를 정리하는 일이다.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대리인 위임장과 필요 서류를 다 갖추고 갔다.


오늘도 역시 퇴짜를 맞았다. 보험과 은행 계좌를 정리한 후 잔액 조회 증명서를 요청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위임 내용을 자세히 열거했지만, ‘잔액 조회’라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개인 정보 보호와 금융 권리 보호에 애쓰는 것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위임 내용을 상세하게 적었다. 또 포괄적으로 보면 잔액 조회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거절하는 것을 보니 일을 아주 꼼꼼하게 한다.

위임받은 내용과 상세 서류를 제시했음에도 거절당한 입장에서야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개인의 권리를 철저히 보호할 것 같으면 해킹을 당하지나 말든지 하는 원망도 들었다. 어차피 규정은 규정이니까 오늘도 소득 없는 발품을 팔았다.


마침 근처 메가박스에서 ‘여행과 나날”을 상영한다. 상영관이 무척 드문데도 근처에 있어 반가웠다. 상영 시간은 하루 한 편인데 마침 시간이 딱 맞았다. 보험 업무는 끝내지 못했지만, 덕분에 영화를 본 것으로 위안 삼았다. 꿩 대신 닭이라도 잡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 주인공의 고민, 그것은 바로 나의 고민이었다.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의 이중주

"나는 별로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영화 <여행과 나날>의 주인공이자 각본가인 '이(李)'(심은경)가 자기 작품 상영회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성공한 배우 심은경 본인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 대사에 끌려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최고도 아니고, 포기할 만큼 형편없지도 않은 어중간한 지점. 저는 평생 이곳에서 살아왔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름을 날렸고, 일본에서 더 유명해진 배우가 이런 말을 한다니 의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 고백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창작자의 목소리가 아닐까.


<여행과 나날>은 여름과 겨울이라는 독특한 이중 구조로 이야기로 이 질문에 답한다.


전반부는 '이(李)'가 쓴 각본을 영화로 만든 여름 이야기다. 낯선 바닷가 마을. 나기사(카와이 유미)가 지역 청년 나츠오(타카다 만사쿠)를 만난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그들은 시간을 보낸다. 대화하고, 비 오는 날 거친 바다에서 수영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을 당혹하게 한다. 주인공들은 말이 별로 없고, 말을 해도 맥락이 불분명하다. 배경 음악도 없이 카메라는 장면을 느리게 따라간다.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할 수 없는 장면이 계속 이어진다. 멀리서 잡는 앵글 속의 여름 바다와 파도, 바람에 흔들리는 숲, 폭우가 쏟아지는 해변, 이 모든 장면의 색조가 무겁고 어둡다.


영화는 지루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도적으로 지루하다. 감독은 설명을 거부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것을 감수한다. 하지만 몽환적이고 전위적인 화면 속에는 고독과 외로움이 배어 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어쨌든 나로서는 좋았다.


후반부는 겨울 이야기다. 슬럼프에 빠진 각본가 '이(李)'가 눈 덮인 설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호텔이 만실이어서 어쩔 수 없이 찾아간 깊은 산속 낡은 여관. 그곳에서 무뚝뚝한 주인과 대화하며 폭설이 쏟아지는 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시 의욕을 찾는다.


두 여행은 여름과 겨울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하지만 두 여행은 묘하게 결이 비슷하다. 두 여성 주인공 모두 유명 관광지를 벗어나 외진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낯선 남성을 만난다. 그렇지만 흔한 로맨스는 일어나지 않는다.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곳에서, 만날 일 없는 사람과, 해보지 않았을 경험을 할 뿐이다. 그 낯선 경험으로 그들은 새로운 활력을 찾는다.


말이라는 이름의 감옥

영화의 주제는 '이(李)'의 독백에 담겨 있다.


"나는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인생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나는 영원히 그곳에 있고 싶다. 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다"


시나리오 작가인 '이(李)'는 말, 즉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자신의 재능을 회의한다. 창작자에게 언어는 양날의 검이다. 세상을 설명하는 도구이자, 동시에 세상을 가두는 틀이다. 서사, 구조, 문법—이런 규칙들이 오히려 삶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어중간한 재능'의 정체다. 완전히 무능하지도 않고, 완벽하게 표현할 수도 없는 그 중간 지대. '이(李)'는 영화를 만들 정도로 인정받는 작가이지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언어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말의 감옥'을 영화의 언어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인물들의 대사는 최소화된다. 대신 자연의 소리—파도, 바람, 비, 눈, 풀잎—에 집중한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이 깊어지는 순간을 차분히 포착한다. 말이 아닌 경험 자체로 관객과 소통하려는 시도다.

그렇다면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완벽한 언어를 포기하는 것,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이(李)'의 여행이 제시하는 해법이다.


무목적 여행의 수확

<여행과 나날>이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아침, 내가 마주한 질문이기도 하다. 여행은 꼭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계획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이 삶이다.


영화 속 여름과 겨울, 두 여행은 사실상 목적이 없다. 가서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소와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사람을 경험할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 무목적성 속에서 '이(李)'는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심은경은 말했다. "최고가 아니어도 된다,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면 된다" 그러나 이 말을 단순한 위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중간한 재능으로 살아가는 모든 창작자,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실존적 과제다.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창작하고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만이 어중간한 우리에게 허락된 솔직한 품격일지도 모른다.


터널을 지나 설국으로

영화에서 겨울 이야기로 접어드는 순간, 기차는 터널을 통과한다. 그 앞에는 폭설이 내린다. 산도, 들도, 기찻길도 흰 눈에 덮였다. 이 장면에서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이 떠오른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을 넘어,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세계를 가르는 극적인 경계를 선언한다. <여행과 나날>에서도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여름 이야기는 끝나고 겨울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 속 '이(李)'에게 터널을 통과하는 행위는 물리적인 이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터널을 통과하기 전, 그녀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서사, 즉 "말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글쓰기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언어와 구조에 갇혀버린 창작의 딜레마는 일상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터널을 빠져나와 눈의 고장에 당도하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그 굴레로부터 단절된다. 마치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가 터널을 지나 요코와 고마코가 있는 환상적인 눈의 나라로 진입하듯, '이(李)'는 기존의 생활 방식을 벗어난 낯선 곳, 즉 '지도 밖의 깊은 산속 여관'으로 들어선다.


두 작품의 지향점은 다르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아름답지만, 차가운 비일상 속에서 인간의 고독과 덧없는 사랑을 응시하는 관찰자였다. 그는 게이샤 고마코와 요코를 바라보지만, 그들과 진정으로 연결되지는 못한다. 그의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자 동시에 실존적 고독의 확인이다.

반면 <여행과 나날>의 '이(李)'는 익숙한 여행의 경로를 이탈한 후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서 받는 그 시간의 경험 자체를 통해 변화한다. 이 경험은 '이(李)'가 '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소망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자신을 옥죄던 '말의 감옥'을 떠나 고요한 자연의 소리 속에서 다시 펜을 드는 실존적 결단으로 이어진다.

어중간함의 용기

배우 심은경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창한 미래를 설계하기보다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가고자 하는 길에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 길에 닿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중간한 재능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그런데도 계속 한 걸음씩 내딛는 그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이고 여행이다.

겨울이 깊어간다. 계획했던 일을 보지 못했지만, 영화 <여행과 나날>을 봤다. 일종의 무목적 가치를 얻은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경험으로 이어지는 통로일 수 있다.

<여행과 나날>은 말의 족쇄와 재능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조용히 속삭인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꿩 대신 닭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어중간함의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 용기가 우리를 낯선 곳으로, 설국으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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